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유한학교의 손종률 교장은 늘 유일한 박사가 교회에 나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매주 교회에 나가는 형식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앙보다 교회를 더 우선시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그러나 딸 유재라의 생각은 다르다.“아버지 유일한은 교회에 자주 나가지는 않았으나 교회의 특별한 절기에는 참석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L.A.에 있을 때는 50분 동안 차를 몰고 가야하는데도 꼭 한인교회 예배에 참석했다”며, “시간이 나면 성경을 많이 읽는 편이었다”고 말
물론 유일한 박사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많은 장점도 있었으나 단점도 없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탁월한 지도자들에게도 그런 양면은 있는 법이다. 그는 일상에서 접하는 사소하고 작은 문제들을 대할 때도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민족에 대한 봉사정신을 잊지 않았다. 언제나 사익을 위해 소탐대실하지 않고 타인과 사회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으며, 다툼과 갈등이 있으면 자신의 이익과 요구를 양보하려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먼 곳을 보고 큰 것을 생각했다.그런 큰 마음과 생각이 있었기에 척박한
유일한 박사 일생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조국에 대한 사랑과 봉사’였다. 그것을 제외하면 그의 생애는 지독한 일중독자라는 빈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그가 아홉 살에 부친의 권고로 조국을 떠났을 때부터 서울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그는 하루도 민족과 국가를 잊은 일이 없었다. 또 그 애국적인 정성과 의지를 몸소 많은 사람에게 행위로 보여 주었다. 유한양행이 설립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기업으로 존속할 수 있었 던 것도 오로지 유일한의 애국심의 소치였다.유일한 박사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 선언을 할 때,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유일한 박사는 나눔의 정신을 실천으로 보여준 경제적 선구자라고 생각된다.“기업에서 얻은 이익을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윤추구는 기업의 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조건이지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 없다.”“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기업은 사회의 이익증진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이다”.그가 항상 이렇게 말한 것은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과 근로정신의 함양을 원한 결과였으며, 그 뜻을 직접
유일한 박사가 한국 역사에 남겨 준 큰 뜻이 있다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기업정신'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정신'이다. 이 두 개의 정신이 그의 일생과 유한양행을 오늘의 것으로 남기게 해 주었다.그러면 그의 기업정신은 어떤 것이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생애를 통해 그의 기업 활동과 기업정신의 면모들을 소개해 왔다.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그의 ‘기업인으로서의 신념과 철학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본다면, 그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는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을 몸소 체험했고 그것을 실천한 인물로 보아도 좋을 것
유일한 회장은 이방자 여사와의 교류도 있고 안익태를 배후에서 돕기도 했다. 그 모든 사람이 유일한을 신사답고 정중하며 신뢰와 존경이 가는 인물로 평했다.누구를 대하든지 진실과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는 가족들을 대할 때도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어느 정도를 아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이것이 문제다.”“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이상적인 인간
유일한을 가까이 접해 온 많은 사람에게 '그의 생활 신념이 무엇이었는가'라고 물으면 표현은 약간씩 다를 것이나 그가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아홉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77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전 일생을 성실하게 보냈다.성실은 '정직'과 '신의' 즉, 믿음을 실천케 한다.정직과 신의가 없는 성실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성실한 인격이 없으면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그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버들표는 신용의 상징'이라고 말했고, '정직은 기업의 생명'이라고 가르쳤다. 그 둘을 버리면
공화당 정부 초창기인 1962년에 유일한 회장은 유한양행 주식을 공개했다. 제약 회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으로서는 최초의 주식을 상장에 의한 공개 법인체였다. 대체로 기업을 공개법인으로 바꾸는 것은 경영의 합리화와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꾀하며, 나아가 자금 등의 한계를 넓혀, 기업체의 사회적 존재성을 제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유한양행은 사정이 달랐다.오히려 공개된 주가보다 다섯 에서 여섯 배의 기업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소유자의 처지에서 본다면 공개하는 것이 손해였다. 그래서 회사 간부들은 일부 이의를 제기 하기도 했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다고 했다.1960년대로 접어들자 유일한 회장도 예순여섯 살의 노인이 되었다. 당시로선 고령의 나이였다. 사람은 누구나 육순을 넘기면 앞일을 계획하기보다는 뒷일을 정리하게 되기 마련이다.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자신이 나서서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1960년대는 우리 사회의 심한 격동기이기도 했다.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정권(제2공화국)'으로 교체되었으나, 모든 면에서 혼란과 정치적 무능이 드러나고 있을 때였다.유일한 회장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밑에 있을 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행복.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들에게 묻는 질문에서 "가장 먼저 왜 이일을 하냐"고 물으면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함께 행복이 묻어난다.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도 3주를 살 수 있으며 물을 마시지 않고도 3일을 버틸수 있다. 하지만, 희망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수 없다. 공교롭게도 희망은 어둠속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래서 작은 희망의 불씨를 항상 남겨 둬야 한다고 한다.현인들은 언제나 지금은 절
기업과 개인의 정실(情實)은 엄격히 구별돼야 한다. 그것은 기업을 키우는 지름길이요. 또한 기업을 보존하는 길이기도 하다. -유일한의 어록 중에서- 유일한 회장의 교육이념과 유한학교 설립 목표는 '나라에 쓸모 있는 일꾼을 만들자'였다.유일한 회장이 미국에서 교육받았을 때 미국에서는 실용주의 풍조가 강하게 일고 있었다. '모든 것은 실제적 가치를 동반해야 하며, 실증적 의미가 없는 추상적 공론은 시급한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됐다. 뿐만 아니라 유일한 회장의 측근들도 모두 실천적 인물들이었다. 사업이나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의료
유한의 정신과 신조우리는 힘을 다하여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 그렇기하기 위해첫째, 경제수준을 높이며둘째, 한결같이 진실하게 일하고셋째, 각자와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 그러므로 각 책임인들은 항상 참신한 계획과 능동적인 활동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자 1964년 3월 16일의 일이다. 입학식 날 , 유일한 회장이 무척 기뻐했다고 송종률 회장은 그 당시를 술회했다. 처음 입학식에 참여한 학생은 58명이었다. 유일한 회장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그들 모두에게 잘 학금을 주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공부를
기업은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서 발전하지 않는다.여러 사람의 두뇌가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발전하는 것이다.-유일한 어록 중에서- 유일한 회장은 평생 동안 '교육'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했다. 만일 그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영주했다면, 교육에 대한 관심을 별로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유일한 회장은 일찍부터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게 된 것은 국민들이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미국이 오늘과 같은 번영을 누리는 것은 국민 교육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3·1운동 직후 한인자유 대회 성명서를 선포할 때에도 유일한 회장은 '국민
기업은 물건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아이디어 기엇이 기업의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유일한 박사의 어록 중에서 -탄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기업의 문을 닫게 하는 데 주로 활용되는 수단은 세무사찰이었다. 세무감사는 이중으로 이루어졌다. 본사는 종로세무서에서 담당하고, 소사 공장은 인천세무서 관할이었다. 할 수 없이 유한양행은 서울 본사를 소사로 병합시키고, 세무 관계는 인천세무서에서 전담하게 하는 방도를 택했다.그러나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세무당국의 사찰은 더욱 심해져 갔다. 그 당시 인천 세무서장은 유한양행의
기업은 물건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아이디어 이것이 기업에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유일한의 어록 중에서 -그해 12월 8일 이명에 유한양행 가족들은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유한양행이 미국 배경의 기업임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더욱이 일본 제약 회사들을 제압할 정도로 사세를 떨치는 것 때문에 일본의 비위를 건드린 대표적인 민족자본의 기업이었다. 그런데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유한양행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에서 언급되는 임금과 스승 그리고 부모님은 우리가 평생 존경하고 받들어야 하는 분들이다.요즘 연말이라는 어수선함보다는 제 33대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장 선출이후 치과계 잡음은 끊이지 않아 보인다. 직선제로 선출된 박태근 협회장은 현재 10여 건 이상의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회무를 위해 종횡무진하는 모습은 여러 채널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소송을 건 고발인은 회장 선거에 함께 출마했던 후보들의 라인으로 알려져 있다. 치과계의 君은 대한치과의사협회장이다. 치협의 회장을 존중하고 회무를 잘할 수 있
“정직 이것이 유한의 영원한 전통이 돼야 한다”-유일한 박사의 어록 중에서-유일한 사장은 이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자신이 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했다.서울에는 유한양행을 중심으로 수많은 유한양행 가족들이 있었다. 사장으로서 유일한의 거취는 그많은 유한양행 가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유한양행은 기업체라는 공익단체로서 그 뿌리는 서울에 있으나. 그 가지는 아시아 전체에 뻗어 있었다. 그런 기업의 대표로서 가볍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그렇다고 해서 미일전쟁의 결과가 한국의 광복을 되찾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을 알면서
이상적인 인간형성을 위해 근면, 성실, 책임감은 바람직한 3대 요소이다. 그러나 여기에 성급하지 않은 성격까지 구비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유일한의 어록중에서- 서울에서 전달되어 오는 소식에는 어려운 면도 없지 않았다. ‘소사공장을 계속 증축했으나 물자의 통제로 자재 투입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소식, ‘외국에서 들여오는 약 원료의 수입원이 엄격히 규제되고 일본의 미쓰이 회사가 대행업체가 되면서 유한양행은 심한 원료난에 착했다’는 보고, ‘운영자금을 자주적으로 조달하지 않으면 일본의 금융탄압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스러운 상의,
기업으로 해서 아무리 큰 부(富)를 축적했다고 할지라도 죽음이 임박한 하얀시트에 누운 자의 손에는 한 푼의 돈도 쥐어져 있지 않는 법이다-유일한의 어록 중에서- 조국의 운명과 더불어1938년 4월, 유일한 사장이 한국을 떠날 때에는 역사적인 시련 속에 서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유한양행의 과거를 통틀어 그때만큼 성장과 발전이 빨랐던 시기가 없을 정도였다.1936년에서 1941년까지는 유한양행이 기적의 꽃을 피운 때였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제약 회사는 한 가지 약품이라도 호평을 받게 되 면 그것으로 사세(勢)가 좌우되
돈을 벌어야만 하는 사람과 돈을 써야만 하는 사람이 만나서 일체가 되어 일을 할 때 거기에 창조적 작업이 이루어진다.-유일한 박사의 어록 중에서-유일한 사장의 가족들, 부인과 딸, 아들은 1938년 4월 유일한 사장이 미국으로 시찰 여행을 떠날 때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나 유일한 사장이 귀국을 보류하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유일한 사장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고 미일간에 곧 전쟁이 벌어질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딸 재라는 아홉 살의 나이 였고 아들 일선은 세 살이었다. 그 뒤부터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