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회장은 이방자 여사와의 교류도 있고 안익태를 배후에서 돕기도 했다. 그 모든 사람이 유일한을 신사답고 정중하며 신뢰와 존경이 가는 인물로 평했다.

누구를 대하든지 진실과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는 가족들을 대할 때도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어느 정도를 아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이것이 문제다.”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

“이상적인 인간 형성을 위해 근면, 성실, 책임감은 바람직한 3대 요소다. 그러나 여기에 성급하지 않은 성격까지를 갖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약한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대하라. 특히 외국인에게는 강하게 대하라.”

그는 생전에 남긴 교훈을 자신이 먼저 실천해서 보여 주었다. 유한양행 발족 당시부터 미국의 아보트 제약회사와 협력을 해왔다. 특히 유한양행이 만주 대륙으로 진출할 때는 아보트의 협력을 얻어, 다롄에 약품 보관창고를 설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몇 해가 안 가서 유한양행은 제약에 착수해 그 성과가 관목할 정도가 됐다. 그래서 유한양행 제품이 만주에 진출하게 되자, 아보트는 유일한에게 심한 압력을 가해 왔다. ‘우리 회사 이외의 약품을 판매할 수 없다’는 통고였다.

유일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한양행이 아보트의 협조를 받은 것이 사실이나 막중한 이익을 아보트에 제공했고, 이제 신생 국가인 한국 의 제약이 발돋움하려는 것을 억제하는 아보트의 처사는 옳게 여겨지지 않았다.

급기야 아보트는 미국 영사관을 통해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때도 유일한은 ‘사회의 정의를 위해 강자에게는 강하게 대하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외국인에게 특히 강하게 대하라’는 태도를 보였다. 자유당 정부와 유한양행은 모든 면에서 비교가 안 되었다.

유 박사는  잘못된 정부를 이용하여 수익을 올리기보다는 시련과 고통을 겪더라도 자유당 정부와 대결하는 형극의 길을 택했다. 만일 그 당시부터 모든 기업인이 정치와 경제의 자주적 협력을 견지해 왔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더 많은 민주적 발전을 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행정 권력이 사법부를 시녀화시킨 것이 대한민국의 큰 낙후성을 가져왔다면, 정치권력이 기업들을 좌우해 왔다는 사실은 그보다 더한 불행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들을 성찰해 봤을 때 유일한의 굳은 의지와 선견지명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강자에게 강하게 대하며, 외국인에는 더욱 강하게 대하라’라는 말은 싸움을 위한 강합이나 투쟁을 위한 투쟁을 뜻하기보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서는 강자가 되며, 불의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마라’는 인식과 의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개인적인 생활신조에 있어 또 한가지 특기할 바가 있다면 그의 ‘미래지향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이다.

물론 일찍부터 미국 사회에서 자랐고 서구 문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유일한은 한국의 앞날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의지와 신념을 평생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이 한국에 대해서는 언제나 ‘미래의 조국’을 생각하게 했으며 자연히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을 갖게 했다.

사실 유일한도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에 비해 미래지향적이며 개최 정신이 강하다고 인정했다.

유일한은 최고(懷古)적이며 전쟁에 짐작하는 한국 사회에 살면서 모든 일에 진취적이며 미래지향적인 포부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 그렇게 행동했다.

그의 생활과 업적이 보여주는 그대로이다. 비록 지금 한국의 현실은 어둡고 힘들지만 밝고 힘찬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의 소유자만이 세상을 개척할 수 있고, 선구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그와 함께 일해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유일한 사장은 항상 내일을 구상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가 내일을 개척해 주었기 때문에 오늘의 유한양행이 있었다. 유일한 박사가 개척해 놓은 일들을 다른 제약회사들은 20년쯤 후에야 실천에 옮긴 감이 없지 않다.

유일한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과 유창한 영어실력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진 미래지향적 가치관과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이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러한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이 유일한으로 하여금 항상 새로운 일을 개척하게 했을 뿐 아니라, 기업과 국가의 장래에 대해서도 언제나 선각자적 방향을 택하게 했다.

세금을 자진해서 많이 내면서도 회사가 정치자금을 부담하는 것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회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 일을 마다한 것은, 먼 후일에도 정치와 경제는 자주성을 가지면서 서로 협조해야 한다는 비전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업을 운영하는 방향에서도 그러했다. ‘내가 하는 일과 유한양행이 하는 일은 반세기는 물론. 1세기가 지나더라도 역사에 오점을 남겨서는 안된다’는 소신과 신념을 갖고 일에 임했다.

그가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도 ‘교육은 미래 사회를 건설하는 기초적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는  미래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낙관주의자는 아니었다. 역경이 닥쳤을 때 쉽게 좌절하지 않고 돌파하려는 의지가 강했을 뿐이다. 이상이 높은 사람이지만 이상만 좋은 건 아니었다. 언제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수단을 찾아냈다. 그때마다 그의 신념과 용기가 빛을 발했고, 뛰어난 능력과 지식이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게 해 주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의 생각이 그리 미래지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때가 반세기 전이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그 당시의 사회적 가치관과 관습에 비춰봤을 때 유일한의 철학과 가치관은 반세기는 앞서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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