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의 정신과 신조

우리는 힘을 다하여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 그렇기하기 위해

첫째, 경제수준을 높이며
둘째, 한결같이 진실하게 일하고
셋째, 각자와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 

그러므로 각 책임인들은 항상  참신한 계획과 능동적인 활동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자 

유한공고내 유한동산의 초기모습
유한공고내 유한동산의 초기모습

1964년 3월 16일의 일이다. 입학식 날 , 유일한 회장이 무척 기뻐했다고 송종률 회장은 그 당시를 술회했다. 처음 입학식에 참여한 학생은 58명이었다. 유일한 회장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그들 모두에게 잘 학금을 주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공부를 하기 힘든 우수한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줘서 장차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키우겠다는 유일한 회 장의 오랜 포부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두 달 후인 1964년 5월 14일, 유일한 회장의 칠순 잔치를 겸해서 오류동 현 교사 자리에서 신축 교사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200평의 교사가 완공됐고, 10월부터는 새 교사에서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유한공업고등학교는 기계과. 건축과 전기과를 신설하고 우수한 기능공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교장으로 부임한 사람은 손종률이다. 손종률 교장은 사회 사업기관인 선명회에서 5년간 봉직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복지사업. 특히 근로 청소년들의 취업과 지도문제를 전공하고 돌아온 젊은 일꾼이었다.

김명선 박사가 손종률 교장을 추천하고 유일한 회장이 받아들여 그는 유한의 식구로서 학교 일 전체를 도맡았다. 유일한 회장은 어떤 사람을 만나서 믿게 되면 끝까지 믿고 일을 맡기는 성격이었다. 어느 날 선명회의 한 미국 선교사가 유일한 회장을 찾아와 손종률 교장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손종률 교장은 그 선교사와의 의견 차이로 선명회를 떠난 과거가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유일한 회장은 그 선교사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 때는 손 교장이 당신과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 얘기를 할 수 있으나, 지금은 내 사람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때로 밑의 사람이 실수를 했더라도 동기가 나쁘지 않다면 유일한 회장은 대범히 넘기는 아랑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설립된 공업고등학교는 인가를 받을 때 한국고등기술학교 로 발족했다. 그리고 후에 「한국고등기술학교」가 정식 공업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을 때, 교명을 「유한공업고등학교로 바꾸었다.

학교 이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상의할 때 유일한 회장은 “한국의 가난한 학생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니까 '한국'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교육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유한공업고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승인을 한 것이다.

당시의 김원규 교육감이 “유한이라는 좋은 이름을 두고 한국이라는 이름을 쓸 필요가 없지 않으냐”며 일방적으로 개명을 지시했다.

손종률 교장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교육위원회와 유일한 회장의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어째서 공공 교육기관이 유한이라는 이름을 써야 하냐”며 유일한 회장은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양해를 받아 오늘까지 유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때 유일한 회장은 자기 지분의 유한양행 주식 17,500주를 회사했다. 그리고 유일한 회장의 정성과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딸 유재라가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의 발전을 지원했다.

이렇게 유일한 회장의 뜻과 김명선 박사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유한공업고등학교의 첫 번째 입학생들은 전부 장학제도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1970년에 접어들어 정부의 교육방침이 추첨제로 바뀌면서 학생 수도 늘어나다가, 다른 공업고등학교와 성격상 큰 차이가 없는 학교로 발전해 버렸다. 정부는 교육의 일률적인 추진과 다수의 학생을 요청해 왔던 것이다.
 

유한공고 제 1회 졸업식에서 유일한 박사의 모습
유한공고 제 1회 졸업식에서 유일한 박사의 모습

 

58명으로 시작된 학교는 1970년대에 이르러 1,450명의 학생이 기술을 습득하는 큰 시설로 발전했다. 사립학교로서 손색이 없는 시설과 교육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유한의 공업교육은 더욱 발전을 거듭해 1978년 3월에는 2년제 초급대학에 해당하는 「유한공업전문대 학을 설립했다.

11개 학과에서 약 3,000명의 젊은이가 수업을 받으며 기술을 연마하는 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배출 된 젊은이들은 현재 사회 각계각층에서 중견 기술자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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