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세 때의 유일한 박사
41세 때의 유일한 박사

 

이상적인 인간형성을 위해 근면, 성실, 책임감은 바람직한 3대 요소이다. 그러나 여기에 성급하지 않은 성격까지 구비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유일한의 어록중에서-

 

서울에서 전달되어 오는 소식에는 어려운 면도 없지 않았다. ‘소사공장을 계속 증축했으나 물자의 통제로 자재 투입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소식, ‘외국에서 들여오는 약 원료의 수입원이 엄격히 규제되고 일본의 미쓰이 회사가 대행업체가 되면서 유한양행은 심한 원료난에 착했다’는 보고, ‘운영자금을 자주적으로 조달하지 않으면 일본의 금융탄압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스러운 상의, ‘일본의 세금 탄압을 미연에 막고 한국과 만주에서의 이중 세금을 줄이기 위해 만주에 독자적인 법인체를 설립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문의 등이 계속 밀려와, 유일한 사장의 지시와 결재를 재촉했다.

그러나 1940년대까지는 희망적인 면이 더 많았다. 풍부한 원료 재고가 있었기 때문에 제품은 계속 생산할 수 있었다. 공급이 뒤따를 수 없을 정도로 판로는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전쟁의 위협만 없다면 유한양행의 의약품은 이미 개척된 대만이나 하노이, 사이공을 기점으로 더 넓게 동아시아를 휩쓸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사장은 한국 토산품 수출이 의약품 수출보다 더 비중 있는 큰 기업으로 이끌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세계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의 해군 소속 비행기들이 미국 태평양 함대가 집결된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문제는 진주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미국의 군사기지가 있는 필리핀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군사적 요충지인 싱가포르까지 손에 넣으려는 작전 준비를 세우고 있었다.

하와이를 포함한 이 지역에 대한 작전을 개시한 직후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했다. 기습적인 폭격으로 막강한 해군력을 잃어버린 나라는 미국이었다. 태평양 함대가 전멸된 셈이었다. 애리조나 전함 안에서 희생당한 병력의 수만도 2,000명이 넘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중국의 앞날을 위해 장제스 총통을 도와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대합중국인 미국이 자국의 일개 주보다도 작은 일본과 전쟁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때였다.

그래서 루즈벨트 대통령도 진주만이 피습되었다는 뉴스로 국회의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준 후에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일본은 동조내각이 들어서는 연초부터 전쟁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나, 미국은 진주만 공격을 받은 후에야 대일전을 준비했을 정도로 시차가 있었다.

진주만 피격 뉴스를 접한 유일한 사장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뒤따라 발표된 선전포고는 전 미국을 뒤흔들었으나 유일한 사장과 그 가족의 놀라움은 그보다 몇 배로 컸다.

그때 유일한 사장은 서울에서 떠난 배에 가득 실린 수출품이 하와이 항구에 도착할 시기를 계산해 보고 있었다. 판매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상품만 도착하면 모든 일이 쉬 풀려갈 수 있는 미국과의 무역에서 중대한 시기였다.

그러나 유일한 사장의 모든 기대와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수출품을 실은 배는 항로를 바꾸어 서울로 돌아가야 했고, 서울과의 통신은 하 루 만에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다. 불과 24시간 동안에 세계 역사의 방향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유일한 사장의 실망과 상심은 너무나 컸다. 오랫동안 유일한 사장은 일본과 아시아에서 겪은 일들을 정리하면 서 미국의 동태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제는 유한양행보다도 한국의 운명이 더 큰 문제였다. 수출보다는 국제관계가 더 큰 비중으로 유일 한 사장의 머리를 무겁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도 L.A.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라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 좋았다. 처음에는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 지역을 점령하는 듯했으나, 미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역습을 시작하면서는 전세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일본과 한국으로부터는 뉴스가 끊겼으나, 중국과의 정보는 미국에 전달되기 시작했다.

유일한 사장은 우선 미국 내에 있는 한국인들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 당시 중국에 임시정부가 있었고,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미국 위원 부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미국 각지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미일전쟁 에서 일본이 패하면 한국은 자주독립을 되찾게 될 것이며, 임시정부는 미국의 협조를 얻어 정부를 세우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당시의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공문을 보내, 그러한 뜻이 성취되도록 청원과 진정을 겸한 호소를 했다. 그것은 한미 양국 모두에 도 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의 회신은 냉담했다. 국무장관 코델 헐은 “어떠한 국민도 자신의 자유를 위하여 스스로 싸우지 않는다면, 미국의 원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대답이었다. 미국의 공식 입장으로서는 당연 한 태도였다.

그러자 이승만과 한국 지도자들은 미육군 전략처장인 빌 도노번 장군과 그 실무자인 페레스톤 굿 펠레 대령 등의 협조를 얻어 한국인들 이 군사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거기에 이승만 외에도 장기영 ・이순용 ・ 김길준 등이 주동이 되어 항일전쟁에 가담할 방도를 강구했고, 임시정부에 그 뜻을 전달하여 중국에서도 충칭과 시안을 중심으로 광복 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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