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화살처럼 빠르다고 했다.

1960년대로 접어들자 유일한 회장도 예순여섯 살의 노인이 되었다. 당시로선 고령의 나이였다. 사람은 누구나 육순을 넘기면 앞일을 계획하기보다는 뒷일을 정리하게 되기 마련이다.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자신이 나서서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1960년대는 우리 사회의 심한 격동기이기도 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정권(제2공화국)'으로 교체되었으나, 모든 면에서 혼란과 정치적 무능이 드러나고 있을 때였다.

유일한 회장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밑에 있을 때, 여러 가지로 시련을 겪었다. 유일한 회장의 주변 사람들은 그 원인이 유일한 회장의 주장과 신념 때문이라고 말했으나, 어떻게 보면 현실을 외면한 유일한 회장의 고집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유일한 회장이 자기편이 되어 일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공부 장관직도 맡아 주기를 바랐고, 정치자금도 흥정에 따라 기업발전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방도가 크게 일리있었다.

다른 기업인들은 실오라기 같은 연출만 있어도 그것을 이용해서 기업 육성에 득을 보려는 판국이었다. 유일한 회장과 이승만 대통령 사이는 굵은 밧줄이 이어져 있는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회장은 그것을 거절한 셈이다.

유일한 회장은 '정치와 경제는 앞으로도 독자적인 위치에서 발전해야 한다. 정당한 세금 이외의 정치자금은 사회악을 조장할 뿐, 조국의 장래를 위해 타당치 못하다'고 믿고 있었다. 유일한 회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애국심이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 잠시 임시정부가 수립된 적이 있다. 그 때 우리나라 산업과 수출의 공로자였던 「천우사」의 전택보 사장이 임시 내각의 상공부 장관을 맡았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신의와 존경을 받는 기업가였다. 그는 학생들의 피의 대가로 이루어진 새 정부의 상공 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자유당 시절의 폐습을 답습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상공부 출입 기자들에게 어느 정도 금품을 제공하는 것도 거절했다.

당시의 정부와 신문사 기자들의 관계를 조야가 모두 규탄하고 있을때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도하의 일간지들이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천우사가 자유당 시절에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심각한 고뇌에 빠진 전택보는 그런 풍토의 사회가 원망스러워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전택보의 경우가 그렇다면 다른 기업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나라 기업은 정부권력의 그늘을 떠나서는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정권과 무관하게 성장한 대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유일한 회장이 이런 풍조 속에서 정치와 경제의 자주적 독립을 지키려고 애써 왔다는 사실은 국민의 입장에서 높이 평가하고 존경해야 할 일이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자유당때 유일한 회장은 서울과 도쿄를 오가면서 유한양행을 키워야 했고, 심지어는 유한양행 간부들이 유일한 회장 몰래 정치자금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유일한 회장이 이승만 대통령이나 자유당 정부를 대놓고 비판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없었다.

"이 대통령은 그런 인물이 아니지만, 측근들이 과오를 범하여 잘못 보좌하고 있다."

더욱이 "이승만 박사가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개인적인 축재를 한다"는 얘기가 들려 올 때는 "그럴 리가 없다. 이승만 박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며 옹호해 주었다. 자유당 정권에 피해는 입었지만 이승만 박사를 감싸주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관계에 있던 자유당 정권이 사라지고 장면 정권이 등장했으나. 모든 것은 더 심한 무질서로 빠져들었다. 정치인들은 정권욕과 감투싸움에 여념이 없었고 경제정책은 혼돈을 금할 바가 없었다.

유일한 회장이 자동차 수입과 부품 관련 사업을 단념한 것도 1960년초의 일이다. 1951년에 창업한 「코리안 모터스」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국회에 승용차 열다섯 대를 공급했다. 1954년에는 정부로부터 40만 달러에 해당하는 자동차 부품수입을 허가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그 부품들이 미국 크라이슬러 자동차로부터 발주를 받아 부산항에 도착할 무렵, 정부는 갑자기 정책을 바꾸어 자동차 수입 금지와 부품 수입 제한령을 내렸다. 여러 해에 걸친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그 일로 유일한 회장은 자동차 사업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우리 정부로서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사회가 이렇게 혼란을 거듭할 즈음,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생각있는 모든 국민이 그러했듯이 유일한 회장도 군사 정부에 대해 깊은 우려를 느꼈다.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반공을 다짐했고, 경제건설을 우선 사업으로 표방하고 나섬에 따라 어느 정도 안도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을 때 유일한 회장의 기우는 신뢰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들의 승인을 얻었고, 1963년에는 민정 이양의 약속을 실천함에 따라 유일한 회장도 과거의 정부에 협조했듯이 정착된 정치 풍토에 따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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