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 이것이 유한의 영원한 전통이 돼야 한다”

-유일한 박사의 어록 중에서-

유일한 사장은 이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자신이 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했다.

서울에는 유한양행을 중심으로 수많은 유한양행 가족들이 있었다. 사장으로서 유일한의 거취는 그많은 유한양행 가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유한양행은 기업체라는 공익단체로서 그 뿌리는 서울에 있으나. 그 가지는 아시아 전체에 뻗어 있었다. 그런 기업의 대표로서 가볍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일전쟁의 결과가 한국의 광복을 되찾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을 알면서 유한양행과의 연락이 끊겨 있는 기간을 일없이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육군전략처 소속의 한국인 지원부대의 일원이 되어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결심이 서더라도 실천에 옮기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게다가 외교적 의미는 중요하나 실질적인 결과는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도 고려했다.

이럴 즈음에 유일한 사장에게 항일투쟁에 협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태평양전쟁에 말려든 미국은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한·중·일 등지의 지리·풍속·언어·문화·정치·경제에 높은 식견을 갖춘 인사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이 일은 미 국무부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군사력 배치에 필요한 요직이었다. 어느 정도의 역량과 실력은 물론 인격과 업적을 갖춘 인물이어야 해낼 수 있는 직책이었다.

유일한 사장은 처음에 그 청원을 받았을 때 걱정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일본 측에 알려지면 유한양행은 적산으로 접수될 수 있었다. 그리고 유한양행 식구들은 일본에 의해 모진 고난을 받을 게 뻔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미국 측은 그 직무가 군사기밀에 관한 것 이므로 비밀은 보장될 거라고 했다. 결코 유일한 사장과 관련된 것에 피해를 초래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 일을 수락하고 난 유일한 사장은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유한양행을 키워 한국 경제에 이바지하는 일 못지않게 한국을 위한 중책을 맡게 되었다는 게 무척 기뻤다. 전쟁의 결과에 따라 한국이 자주독립 을 쟁취할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이바지하고 싶었던 유일한 사장에게 그 직무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유일한 사장은 조국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유한양행에 대한 근심을 잊을 수 없을 때마다 “머지않아 일본은 패망한다. 그러면 우리 조국은 해방된다. 해방된 조국에서 유한양행의 깃발을 떳떳이 게양하고 제2 -의 황금기를 만들어 보자. 고국에 있는 사원들과 간부 동료들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고 기다려다오”라는 의지를 표명하곤 했다.

잠시 이야기의 방향을 유일한 사장이 없는 서울로 돌려야 하겠다. 1938년 봄, 유일한 사장이 수출 확대를 위해 한국을 떠날 때 유한양행의 사세는 승승장구의 기세를 뻗치고 있었다. 제약과 판매는 유일한 사장이 없어도 충분히 발전시켜 갈 수 있었다.

유일한 사장이 만들어 준 전통에 따라 중역회의에서 중지를 모아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리고 독립된 무역부에 비중을 더하여 나전 칠기 공장과 토산품 제조공장을 신설했고, 수출품을 선적하여 떠나보낼 때까지 만사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1941년 여름부터 조선총독부 안에서 은밀한 계획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그때 이미 '미일전쟁' 결행을 결정하고 후속조치까지 세워진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공략 목표 중 하나가 유한양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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