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유일한이 그립다

유일한을 가까이 접해 온 많은 사람에게 '그의 생활 신념이 무엇이었는가'라고 물으면 표현은 약간씩 다를 것이나 그가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아홉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77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전 일생을 성실하게 보냈다.

성실은 '정직'과 '신의' 즉, 믿음을 실천케 한다.

정직과 신의가 없는 성실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성실한 인격이 없으면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그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버들표는 신용의 상징'이라고 말했고, '정직은 기업의 생명'이라고 가르쳤다. 그 둘을 버리면 기업은 실패하기 마련이며, 정직과 신용을 저버릴 바에야 기업을 할 필요조차 없다고 강조했다.

<유한 50년사>에 수록된 그의 어록을 보면 "기업의 생명은 신용이다"로 시작해서, 마지막은 "정직, 이것이 유한의 영원한 전통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로 끝난다.

그는 정직과 신용에 대한 이 같은 생각을 개인생활은 물론이고 기업을 경영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어겨본 적이 없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한국YWCA 책임자인 P여사가 유일한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YWCA에서 캠프장을 하나 마련하려고 하는데 자금이 부족해서 부지 마련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서 땅을 기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유일한은 그런 청원을 수없이 많이 받았다. 누구보다 전통 있는 종교기관인 YWCA의 부탁은 꼭 들어주고 싶었다.

"부지가 생기면 언제 착공할 수 있습니까?." "부지만 있으면 늦어도 2년 안에 착공할 계획입니다."

유일한의 물음에 YWCA 책임자인 P여사가 즉각 대답했다. 그녀의 목적은 자금이나 건물이 아니라 캠프장을 지을 땅을 얻는 것이었다.

유일한은 2년 안에 착공한다는 구두 약속을 받고, 소사에서 산 너머 있는 4만평이나 되는 양지바른 대지를 YWCA에 기증하기로 했다. 2년이 다 되었을 무렵, 유일한은 측근들을 데리고 산책 삼아 그곳까지 가 보았다. 그런데 아무 변화도 없었다. 착공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온 유일한은 YWCA 책임자인 P여사를 불러 "그 땅을 당장 다시 내 놓으시오"라고 호통을 쳤다. 심상치 않은 눈치를 챈 P 여사는 당장 사과의 뜻을 전하고 캠프 건설에 착수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있는 YWCA의 '버들 캠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 사무실 오른쪽 벽에는 기증자에 대한 감사함과 약속의 중요성을 잊지 않기 위해 유일한 회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유일한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 땅이나 땅의 값이 아니었다. '서로 믿고 살 수 있으며 약속을 꼭 이행하려는 삶의 자세'였다. 만일 YWCA에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몇 개월 착공이 연기되었다고 연락을 했더라면 유일한은 고맙게 생각했을 것이다.

유일한은 자신부터 약속을 철저히 지켰으며 남에게도 약속의 엄격함을 요구했다. 심지어는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도 차용증을 받을 정도였다.

"약속은 돈보다 중요한 것이다. 신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하는 목숨 같은 것이다."

유일한은 딸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유재라는 어른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장관의 요청을 받고 면담을 하러 갔다가도 장관이 약속 시간을 어기면 그대로 되돌아왔다. 그 정도로 유일한은 신의와 약속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았다.

성실한 사람은 항상 배우고 자라며 노력하는 생활을 한다. 유일한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기간에 생긴 시간적 여유를 이용해서 남가주대학에서 경영학을 연구해 석사 자격을 얻었고, 다시 50의 나이로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했을 정도로 학문적 정열을 잃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생애는 계속된 탐구와 노력의 연장이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깨닫고 배워야 할 점이 있으면 토막시간을 이용해 배움의 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라디오로 듣는다든지 안익태의 지휘로 연주되는 음악회에 참석한 일은 있었어도 말이다.

그는 여유가 생기면 독서와 공부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틈만 나면 글을 썼다. 잠깐의 자투리 시간도 그냥 흘려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 게으름을 피우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양 속담에 '시간은 돈'이라는 말이 있다. 그에게 시간은 돈보다 더 중요한 생명 같은 것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유일한은 유한양행의 모든 사원들이 공부와 자기 계발에 많은 시간을 쏟기를 요구했다.

“연마된 기술자와 훈련된 사원은 기업의 최대 자본이다.”
“기업의 기능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사색하고 관찰하는 습관은 인간의 지적 성장을 위한 촉진제다.”이 같은 말을 그는 언제나 되풀이했다.

유한양행 초창기부터 전문학교 이상의 인재를 신입사원으로 영입한 뒤에는 계속 사내 교육을 시행하고, 교육투자에 선구자적 길을 열어 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은 인간이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원을 키우는 것이 곧 기업 성장을 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적지 않은 사원들을 일찍부터 해 외연수를 보낸 일도 특이하다고 할 만하다.

때로는 조카들로부터 편지 받은 것을 일일이 고쳐 주면서 더 좋은 문장을 쓰도록 이끌어 주었다. 언제나 자신을 위해서는 배우고, 남을 위해서는 가르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고령에 접어들었으면서도 두세 차례 해외여행, 그것도 세계일주를 한 것은 오로지 사업상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었다. 항상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적응하며 젊은이 못지않게 배우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아들 유일선에게 말없이 요구한 것이 이러한 ‘성실과 성장의 자세’였는데, 아들은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예순이 넘어서도 배우려 했으나, 아들은 서른으로 완성된 듯 자부심을 가진 것이 부자간의 차이이기도 했다.

겸손하므로 배우고 노력해서 자라야 한다는 정신이, 계속 그의 성실한 인품 속에 깃들고 있었다.

그의 인간적 성실성은 대인관계에서도 잘 드러났다.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했고, 언제나 예의를 잊지 않았다. 허물없이 가까운 사이의 친구간일지라도 흐트러진 태도로 임하는 길이 없었고, 특히 상대방의 지위나 사회적 명예를 인간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잊지 않았다.

펄벅 여사와의 교우관계가 끝까지 원만하게 이어진 것도 그 하나의 예이며, 구순의 고령으로 한국과 유한양행을 방문한 피셔(Fisher) 박사도 유일한 박사와 깊은 우정을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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