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정부 초창기인 1962년에 유일한 회장은 유한양행 주식을 공개했다. 제약 회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으로서는 최초의 주식을 상장에 의한 공개 법인체였다. 대체로 기업을 공개법인으로 바꾸는 것은 경영의 합리화와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꾀하며, 나아가 자금 등의 한계를 넓혀, 기업체의 사회적 존재성을 제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유한양행은 사정이 달랐다.

오히려 공개된 주가보다 다섯 에서 여섯 배의 기업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소유자의 처지에서 본다면 공개하는 것이 손해였다. 그래서 회사 간부들은 일부 이의를 제기 하기도 했다. 공개를 서두르기보다는 소유 자산의 재평가를 내려 적절한 주가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수정론도 대두되었다. 그러나 유일한 회장의 결의는 단호했다.

“우리나라 기업이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장족의 전을 기대할 수 없다. 회사가 다소 시끄러워질망정 많은 사람을 참여 시켜야만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고, 국가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왜 유일한 회장은 자신의 재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주식상장을 단행했을까. 거기에는 그의 확고한 몇 가지 신념이 깔려 있었다. 모든 기업의 이윤은 건전한 기업성장을 위한 투자 외에는 반드시 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소신이 첫 번째 이유였다.

기업은 개인의 재산을 늘리거나 기업주의 소유를 증진시키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기업은 언제나 사회로부터 성장 발전하여, 그 혜택을 사회로 환원시키지 않으면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기업 이념이었다.

첫 번째 이유보다도 더 중요한 기업의 이념은, ‘모든 기업이 앞으로는 공개 법인체가 되어야만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유지되며, 국가적으로 최선의 봉사가 될 수 있다’는 철학이었다.

만일 모든 기업이 소유체제에서 사회에 대한 기여 체제로 바뀔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공산주의나 복지체제가 뒤따를 수 없는 최상의 경제 체제가 될 것이라고 유일한 회장은 믿고 있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러한 발상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첨단을 걷고 있는 미국에서도 쉽게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경영이념을 성취시키는 데는 끈질긴 사회적 요청과 국가적 제약은 물론, 법적 추진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것을 유일한 회장이 당시 우리 현실 속에서 실천했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나 1974년 5월 19일에서야 우리 정부가 비로소 기업 공개를 촉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유한양행의 선택은 높이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아직도 이름이 많은 기업들이 공개를 꺼리고 있으며, 가족체제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일한 회장의 선구적 정신에 비해 우리 사회의 기업적 추진성을 유감스럽게 재평가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유일한 회장은 자신의 의지를 몸소 실천에 옮겨 다음 해에는 자신의 개인 재산인 주식 12,000주를 연세대에 기증했다. 요청 받은 것이 아니라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뜻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또한 5,000주를 보건장학회에 기증하여 개인 소유의 주식과 재산을 대 부분 육영사업과 보건기구에 희사했다. 그것은 주식 상장과 뜻을 함께 하는 갸륵한 정신의 발로였다.

그렇다고 해서 1960년대 유일한 회장이 기업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해마다 계속 투자를 유치해 자본금을 늘려 나갔고, 외국의 지명한 제약 회사들과 제휴를 맺어 기업 확장을 거듭했다.

일찍부터 속초에 「어간유 제유소」를 만들어 국민 보건에 이바지했고, 홍콩에는 최초로 ‘인삼네오톤’을 수출했다. 지금 유한양행 본사가 있는 대방동에 2,000여 평의 대지를 매입해서 본사 사옥을 완성시켰다. 유한공업고등학교에는 유한중학교를 병설해서 교육기관을 보완해 갔고, 소사 공장을 펄벅 재단에 인계해 주었다. 196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PAS 원료생산을 시작했다. 1968년에는 제약업계에서 처음으로 IBM 전자자료 처리실을 설치하기도 했다. 사보를 비롯한 홍보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한국아동양호회에 약품을 기증하는 등 많은 사회사업에도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었다.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의 표창을 받은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다. 유일한 회장이 요청했거나 유한양행이 정부에 어떤 뒷받침을 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었다. 사회적 여론과 정부가 유한양행을 지켜보는 가운데 내려진 사필귀정의 결과였다.

그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1967년 말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국세청은 세원을 파악해 국세 수입을 올리기 위해 업종별 세무사항을 엄격히 실시했다. 연간 3억 원의 거액을 자진납부하는 유한양행에서 더 많은 세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 국세청은 김만태 반장을 주축으로 엄격하고 치밀한 세무감사를 실시했다.

11월 15일에 착수하여 12월 7일까지 계속된 세무사찰은 그야말로 물샐 틈 없었다. 특별사찰반원들은 장부를 하나도 빼지 않고 검토하 나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3억 원의 세금을 납부하는 유한양행에 1월에도 부정수입이나 부정 지출이 없었다. 이중장부가 횡행하던 당시로서 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납세액이었으며, 일체의 결함이 전혀 없다는 것 은 더욱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부정을 파헤치는 것이 목적이었던 특별사찰반은 마지막으로 유한양행이 판매하고 있는 약품들을 모두 과학기술처로 이송해서 함량 여부를 의뢰했다. 과학기술처의 회신은 간단했다. '함량 미달 없음'이었다

김만태 반장은 할 수 없이 그 사실을 국세청에 보고했다. 국세청 위시한 우리 정부는 유한양행의 기업정신을 높이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김만태 반장은 유한양행과 같은 모범업체를 찾아낸 공로로 동남아 여행의 특전을 얻었고, 후에 승진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정부는 이 일을 계기로 유일한 회장에게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세무관계로 산업훈장을 받은 사례도 없었거니와 어딘가 우리들의 마음을 올리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영예를 접한 유일한 회장은 태연한 자세였다. 그는 모든 기업체가 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정부의 생각보다 앞서 있는 유한양행의 정신이라고 봐야 할 일이다. 우리 경제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숨은 이야기의 하나로 오래 남을 것이다. 바로 유일한 회장이 그 일화를 만든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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