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2차 도미직전. 서울에서 개최된 유한양행 주식회사 발족을 마치고 (앞줄에서 왼쪽 네번째가 유일한 박사)
1936년 2차 도미직전. 서울에서 개최된 유한양행 주식회사 발족을 마치고 (앞줄에서 왼쪽 네번째가 유일한 박사)

 

기업은 물건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디어 기엇이 기업의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유일한 박사의 어록 중에서 -

탄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기업의 문을 닫게 하는 데 주로 활용되는 수단은 세무사찰이었다. 세무감사는 이중으로 이루어졌다. 본사는 종로세무서에서 담당하고, 소사 공장은 인천세무서 관할이었다. 할 수 없이 유한양행은 서울 본사를 소사로 병합시키고, 세무 관계는 인천세무서에서 전담하게 하는 방도를 택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세무당국의 사찰은 더욱 심해져 갔다. 그 당시 인천 세무서장은 유한양행의 취체역 예동식과 친한 사이여서 여러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인천세무서 총무과장이던 이건웅이 후에 유한양행의 제8대 사장이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유한양행은 한국인들의 은밀한 협조를 받아 일본의 거센 탄압에서 살아남았다. 당국은 1942년 2월부터 본격적인 세무사찰에 착수했다.

세무서 직원 20여 명이 투입되어 정상적인 근무를 할 수 없을 정도의 방해공작을 펴나갔다. 회계담당 취체역 예동식과 공장관리 과장 홍병규가 겪은 고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유일한 사장을 대신해 제2대 유한양행 사장으로 취임한 유명한과 감사역 강한인은 1942년 12월, 종로경찰서에 연행당하는 일도 겪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후, 유한양행은 탄압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일한 사장 대신 그의 동생인 유명한을 사장으로 영입했다. 

유일한 사장의 명의로는 모든 일이 벽에 부딪치는 결과를 피할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련에 대비해서 유한양행은 조선은행 소사지점에 항상 100만 원이란 거액을 에치시켜 두고 있었다. 유사시 세금 문제를 신속히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심한 조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한양행의 정리와 회계정리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세무 부정을 찾을 길이 막혀버린 세무당국은 세무조사를 구실로 업무를 중단시켜, 유한양행이 자진해서 문을 닫게 하는 방도를 획책했다.

세무사찰은 그때부터 시작해서 8.15 해방을 맞을 때까지 계속됐다. 이렇게 일본이 악의적으로 세무사찰을 했는데도 살아남은 것을 보면 유한양행이 얼마나 깨끗하고 투명하게 기업을 운영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유한양행 사원들중 에 친미배일의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진 이가 있다며 수시로 회사에 드나들면서 사람들을 체포해 갔다. 일본은 유한양행을 말살시키기 위해 탄압을 계속해 나갔다. 그 일환으로 사상 문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유한양행 사원 세 명이 8·15 광복 다음 날에야 석방된 것을 보면 일본의 탄압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탄압에 쉬이 넘어갈 유한양행이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 초창기부터 중반기까지 갖은 박해를 받아가면서도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제약원료를 일본과 만주, 중국에서 개발해 들어왔으며, 폐쇄됐던 상하이 지점을 복구시키기도 했다. 동남아 일대로 수출 시장을 넓혀가기도 했고, 철원 지역에 8만 평의 농지를 매입해서 한약초를 배양하는 일까지 진행시켰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후반기에 집어 들면서 유한양행을 둘러싼 두고 외적인 여건이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계사의 흐름이었다.

패전을 예측한 일본의 발악은 극심해졌고 군수산업을 제외한 모든 기업은 종식 상태로 기울기 시작했다. 역사적 기념물인 동상까지도 징발해서 군수공장으로 가져갔다. 식량까지도 통제를 받아야 했다. 젊은이들은 군인과 징용으로 끌려가는 등 사태가 위급해졌으니 기업체들이 겪는 고초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직 이러한 역경을 극복해 나간 것은 유한양행을 해방 때까지 지켜 온 간부들의 투철한 애국심과 유일한의 확고한 기업정신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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