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박사가 한국 역사에 남겨 준 큰 뜻이 있다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기업정신'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정신'이다. 이 두 개의 정신이 그의 일생과 유한양행을 오늘의 것으로 남기게 해 주었다.

그러면 그의 기업정신은 어떤 것이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생애를 통해 그의 기업 활동과 기업정신의 면모들을 소개해 왔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그의 ‘기업인으로서의 신념과 철학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본다면, 그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는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을 몸소 체험했고 그것을 실천한 인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유일한 박사와 미국은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는 성장기를 미국에서 보냈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와 유한양행을 시작하게 된 발판도 미국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의 많은 회사와 거래를 했다. 유한양행의 발전에 미국과의 관계는 중요한 위치를 담당했다.

유일한 박사는  한국 실정에 맞게 미국식 경제 체제를 이식하고 싶었다. 그것은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이었다. 그 정신을 한국 실정에 맞게 한국적인 것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 유한양행이었고, 유일한 박사의 경영철학이었다.

미국적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몇 가지 기업이념 중 하나가 자본에 대한 소유의식이 경영에 따른 기여의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자본주의가 처음 발족할 때는 재산과 자본이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산업혁명의 모순과 갈등을 겪어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며, 사회주의적 복지 경제나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탄생한 것도 부가 한 곳에 집중되거나 개인의 소유로 굳어져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더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계승해온 미국은 일찍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개선과 개혁을 서서히 단행해 왔다. 미국은 기업 경제활동의 자주성은 보장하되, 기업가 개인의 소유 체제에서 기업을 위 한 기여 체제로 개편하는 방향을 택했다.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 머물고 있던 시기가 바로 ‘세금에 의한 사회복지 강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부의 편중을 막고, 중산층의 육성을 위해 주식의 공개와 특정인의 소유를 제약하기에 이르렀다.

그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1983년에 뉴욕의 체이스 맨해튼 은행 총재인 록펠러가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은행은 록펠러 '가문' 의 은행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은행이다.

기자들이 그에게 “당신의 지분이 얼마냐?”고 물었을 때 그는 “5%”라고 대답했다. 나머지 95%는 국민이 원하는 대로 소유할 수 있다. 결국, 소유자는 록펠러가 아니라 주주인 국민이다. 그 5% 주식의 이익도 많을 때는 록펠러가 사회에 환원하든가 세금으로 내야 한다.

그러면 록펠러가 소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은행의 운영권이며, 은행에서 얻는 이윤의 사회적 사용권이다. 우리는 그 은행이 어떤 개인의 명의로 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개인의 소유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소유의 한계는 지극히 제약된다.

학자가 학문으로 사회에 봉사하며 정치가가 정치를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듯이, 기업가는 그 ‘기업의 이윤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는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다.

적어도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 머물 때 이해한 자본주의는 그러한 기여 채제가 확립된 상태였다. 그리고 모든 기업이 ‘소유 체제’에서 ‘기여 체제’로 변화 및 발전할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만큼 좋은 경제 체제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자연히 기업에 있어 경영진의 독립을 초래하게 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소유주가 경영주이기 때문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경영책임자가 되는 경우도 있고, 기업의 이윤을 사회로 환원하는 과정이 늦어지곤 한다.

그러나 유일한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세금에 의한 사회적 기여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기업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으로 주식을 공개해서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오늘날에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엔 기업은 창업자 개인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 시절에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개인 회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법인체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말년에 아들을 부사장에서 해임한 뒤 인척이나 혈연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조권순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것은, 경영의 자주성을 확정지어 준 모범 사례라 할수 있다. 

지금도 우리는 경제계에서 소유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폐습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데, 반세기 전에 이미 그 역사적 의무를 깨닫고 노력한 유일한의 탁월한 식견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자본주의가 갖는 또 하나의 정신은 ‘일을 사랑하는 근로정신’이다. 만일 우리가 유일한에게 영국이나 현재 호주가 택하고 있는 복지 체제의 경제관을 물었다면, 유일한 박사는  어떤 견해를 피력할 것인가.

아마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시간을 일하고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쉬는 것이 노동조합의 가치관이며,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면 유일한 박사는  그 생각을 기초부터 마땅치 않게 여겼을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더 많은 경제적 혜택을 나누어 갖는 것이 옳으며, 그것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청교도(Puritan)적인 경제관념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일하고 그 대가로 이윤을 올려라. 그러나 그것은 나와 가족의 소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쓰여야 한다’라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건전한 자본주의 경제관 아니겠는가.

고범서 교수가 숭실대학에서 발간한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를 정리한 논문을 보면, 그는 유일한 박사를  성서에 나오는 ‘청지기’로 지칭했다. 청지기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하는가.

주인의 재산을 위임 받아 최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이윤을 올린다. 그렇다고 해서 그 원금이나 이윤을 청지기는 조금도 소유하지 않는다. 맡았던 원금과 이윤을 그대로 주인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청지기는 그렇게 일하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기며 일의 과정과 결과에서 생의 의미를 찾는다.

내가 편히 살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일하고 많은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국민경제를 생각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한다면, 더 많은 일을 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고 싶다고 유일한 박사는 생각했다. 

또 사회적 현실이 그렇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부터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경제 체제와 영국 중심의 복지 체제, 그리고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실질적으로 경제 경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1세기가 지난 지금  공산주의 경제 체제는 이미 실패를 자인했고 복지 체제는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가 하면 미국, 일본을 위시한 자본주의 체제가 앞서고 있지 않은가.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유일한 박사는  미국적 자본주의를 긍정했고. 그 한국적인 인식을 원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사실 여섯 시간을 일하고 열여덟 시간을 노는 호주가 몇십 년의 세월이 지나면 경제적으로 이등 국가가 되며, 열 시간을 일하고 열 네 시간을 휴식하는 일본이나 한국이 언젠가는 경제적 일등 국가로 성장하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일의 혜택을 더 많은 사람이 고르게 누릴 수 있다면, 더 큰 행복이 약속될 수 있다. 그런관점에서 유일한 박사는 그런 정신을 실천으로 보여준 경제적 선구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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