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1898-1967)

[텅빈 가면 ]  1928, 캔버스에 유채, 73x92cm, 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립 미술관
[텅빈 가면 ] 1928, 캔버스에 유채, 73x92cm, 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립 미술관

 

르네 마그리트 René Magritte는 1898년 벨기에의 프랑스어권 도시 투르네 근교 레신에서 태어났다. 샤틀레와 샤를루아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브뤼셀의 왕립 미술원에서 수학했다. 이곳에서 빅토르와 피에르 부르주아 형제와 화가 피에르-루이스 플루케를 만났다. 

1919년 마그리트는 부르주아형제가 출간한 평론지 날자! Au Volant의 창간에 기여했다. 

1년간 병역 복무를 한뒤 처음에는 브뤼셀의 벽지공장에서 그 후에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포스터, 홍보물, 전시회스탠드 등을 디자인했다. 

1926년에는 최초의 초현실주의 회화 <길잃은 기수>를 선보였고, 같은 해에 다른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함께 두 개의 성명서 「두 불명예」와 「에펠탑의 부부」에 서명했다. <텅빈 가면>을 그린지 1년 후인 1929 년, 『날자!』의 마지막호에 도발적인에세이 「언어와 그림」을 기고했다.

마그리트는 ‘화가’ 라는 명칭은 좋아했지만 ‘예술가’ 라는 단어는 혐오했다. 화가란 상당히 성가신 직업이지만, 적어도 사고와 사고의 명료한 전달과 관련되어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그림이라는 문제는 언어라는 더욱 크고 훨씬 근본적인 질문속에 박혀 있었다. 그려진 조형적인 이미지는 단순한 복제를 피한다면- 지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언어는 사물의 세계를 전달하는가? 그리고 각기 다른 언어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는 무엇(혹은 어디인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전반 마그리트가 이름과 그 이름이 붙은 사물 사이의 관계, 상황과 묘사 사이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탐험하게끔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물음들이었다.

1926년 마그리트는 첫번째 ‘파이프’ 회화를 선보인다. 파이프 그림아래 ‘파이프’라는 글자를 끄적거린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미지이다. 확신을 주는 동시에 모순적인 이러한 장치는 언어의 ‘해석’을 강요한다.
그림으로 언어를 읽고, 언어로 그림을 읽는 것이다. 1928년 마그리트는 이 단순한 메커니즘을 더욱 복잡하고 부정적인 언어-이미지게임으로 확장한다. 
 

[이미지의 속임수] 1928-29, 캔버스에 유채, 60x81cm,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이미지의 속임수] 1928-29, 캔버스에 유채, 60x81cm,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이미지의 속임수>(1928-29)에서 마그리트는 환영과도 같은 파이프 그림밑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는다.

‘Ceci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미지는 유령과도 같은 흔적일뿐 사물과 혼동해서는 안 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더욱이 언어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활자화된 언어의 권위 -진실성-는 이미지의 속임수습성때문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그리트는 <이미지의 속임수>를 발표한 직후 <텅빈 가면>을 제작했으며, 여기에서도 그림이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느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가면’이라는 단어는 무언가 숨기거나 감추고 있음을 암시하며 우리는 그림이 우리에게서 뒤돌아보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뒷모습뿐이다. 

네 부분으로 고르지 않게 나뉜, 불규칙적이고 다소 비정상적인 캔버스가 어두운, 무대같은 공간에서 있다. 각각의 부분에는 일부러 고른 애매한 단어나 문구가 붙어 있다. 
 

[꿈의 해석]  1930, 캔버스에 유채, 81x60cm, 개인 소장
[꿈의 해석] 1930, 캔버스에 유채, 81x60cm, 개인 소장

‘ciel’은 하늘, 창공, 혹은 천국을 의미한다. corps humain(ou forét)’은 개인 혹은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육체를 의미하며 체질(숲)을 의미하기도 한다. ‘rideau’는 커튼 또는 스크린을, façade de maison은 집의 정면(극장에서 정면)을 뜻한다. 

이러한 네 개의 공간을 생각해보는 것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서 표현의 한계를 인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물들이 형이상학적인 무엇으로 빠져나가는 현실이 환영에 자리를 내주고 언어의 도구적 이용이 마치 마술처럼 시가 되는 그런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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