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몬드리안 (1872-1944)

[회색과  황토색의  구성] 1918,캔버스에 유채,  80.5×4 9.5cm,  휴스턴미술관
[회색과 황토색의 구성] 1918,캔버스에 유채, 80.5×4 9.5cm, 휴스턴미술관

피트 몬드리안 Piet Mondriaan (Mondrian)은 187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1892년부터 1897년까지 암 스테르담의 왕립아카데미에서 수학했으며 1909년에는 신지학회에 가입했다.
아카데미즘풍의 풍경화 기술을 습득한 그는 1909~10년에 이미 점묘주의를 실험하고 있었고 1911년에는 입체파에 가담했다.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첫번째 ‘모데르네 쿤 스트링’ 전시회에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의 입체 파회화를 접한 그는 이듬해 파리행을 결심한다.  제1 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로 돌아와 자신만의 비구상, 신조형주의 기법을 발전시켰다. 또 테오반두스부르흐, 바르트 반데르레크, 조르주 반통겔루 등과 함께 데스테일을 창립했다.

이들은 건축, 그래픽 디자인, 산업 디자인의 영역에까지 신조형주의를 확장하고자 했다. 1919년 파리로 돌아온 이후에도 1925년까지 계속 데스테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대각선 요소를 도입하는 문제를 놓고 반두스부르흐와 이견이 생기면서 탈퇴했다.

1938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우자 런던으로 이주했다가 1940년 다시 뉴욕으로 옮겨갔으며 1944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테오  반두스부르흐는  신조형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원칙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혔다.
‘예술작품은  이미  제작 전에   마음속에서  표현과  형성이   완료되어야 한다.   자연이나  감각,  혹은  감정에서 어떠한 형식적 인상을 받아서도 안된다. 우리는 서정 성, 극적 요소, 상징주의, 그 밖의 모든것을 배제한다.’ 이러한 엄격한 견지에서 본다면 몬드리안 역시 실패 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우선 몬드리안의 작품은 미리 표현된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  펼쳐  놓은  것,   그것도-미완성작에서   알 수 있듯- 기나긴  수정작업을  거친  것들이다.
또한 자연이나 감각에서 끌어낸 형식적 인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몬드리안이 중요시한 수직과 수평사이의 대비는 오랜 기간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이룩한 것이며 차가운 객관성보다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어필한다.

[구성  C  (빨강,파랑,  검정,그리고  황록색의  구성)]1920,캔버스에유채,  60.3×6 1cm,  뉴욕  현대  미술관(MoMA)
[구성 C (빨강,파랑, 검정,그리고 황록색의 구성)]1920,캔버스에유채, 60.3×6 1cm, 뉴욕 현대 미술관(MoMA)

몬드리안의 작품들은 시각적인 에너지로 가득차 있고 그형식적인 팽팽함에서 힘을 얻는다.
<구성  C〉는  비조형주의를 탈피하는 과도기(1917- 21)에  탄생한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몬드리안은 이작품에서  다양한 색채를 이용하는 한편 색조대비에서는  절제된  접근을  보여주었다.

후기작에서 그는 보다 ‘벌거벗은’ 색채 역학으로 눈길을 돌린다. 순수한 빨강, 노랑, 파랑들이 검은 직선이 만들어낸 바둑 판에 갇혀 새하얀 배경을 바탕으로 빛난다.
<구성 C>에서는 회색 톤의 조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은근하게 서로 다른 세가지회색이 세심하게 조절한 원색과 대조를 이룬다.

빨강은 살짝 오렌지빛을 띠고, 파랑은 하양이 약간 섞이면서 더 밝아졌다. 노랑은 녹색, 검정은 갈색에 가까워진다.

바둑판은 두가지 중간톤의 회색으로 그려졌는데, 이선들은 각 색상을 이어주거나 혹은 색조를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전반적인 효과는 정확하게 조절된 매우 얇은 채색면의 전·후진 운동이다. 

[색채구성B] 1917,캔버스에 유채, 50×4 4.5cm, 오테를로,크륄러뮐러 미술관
[색채구성B] 1917,캔버스에 유채, 50×4 4.5cm, 오테를로,크륄러뮐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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