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모란디 (1890-1964)

[정물 ]1919 캔버스에 유채, 60×70cm, 밀라노, 브레리 미술관
[정물 ]1919 캔버스에 유채, 60×70cm, 밀라노, 브레리 미술관

1890년 볼로냐에서 태어난 조르조 모란디 Giorgio Morandi 는 스무살 때부터 어머니, 세누이와 함께 폰 다차가에 있는 집에 살면서 작업했다(그리고 끝내 같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1907년부터 1911년 까지 볼로냐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폴 세잔의 작품들을 복제본으로 접했다. 또 피렌체, 아레초, 그 밖의 이탈리아 도시들을 여행하며 조토,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했다.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잠깐 미래파에 한눈을 판 뒤 자진해서 군에 입대했으나 이때부터 심각한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1918년 첫 번째 ‘형이상학’ 회화를 완성했다. 18개월에 걸쳐 그린 열두 점의 정물이었다 (1919년의 <정물>은 이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들은 모란디를 단번에 형이상학파의 핵심멤버로 각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192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세잔의 그림을 실제로 본 뒤 그는 형이상학파와 결별한다. 모란디는 예술계나 예술시장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볼로냐 아카데미에서 조판을 강의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26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1964년 볼로냐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르조 모란디는 철학자의 화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많은 양의 독서와 특히 고전철학 분야에서의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모란디는 젊은시절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바로 이러한 배경이 모란디로 하여금 형이상학 회 화안에서도 한 갈래 길에 초점을 맞추게 했을 것이다. 

조르조 데 키리코가 니체의 난해하기 짝이 없는 사상에 걸려들어 헤어 나오지 못했다면 모란디는 플라톤식 형이상학의 보다 맑은 공기를 맡는 편을 택했다. 

1919년도작 <정물>에서 모란디는 플라톤식 형태의 완전히 명료한 비물질적 세계를 보여주는데, 이 세계는 오히려 물질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다. 

가장 눈에 띄는 시각적 모델은 피렌체의 거장 파올로 우첼로의 산로마노의 전투의 전경이다. 여기에서 우첼로는 버려 지고 부서진 무기들을 엄격하게 관점의 ‘새로운 과학 법칙대로 배치함으로써 평면도와도 같은 공간을 창조했다. 

우첼로가 여전히 새로운 관점을 시각적으로 실험 중이었다면 모란디는 사물을 화면 가까이에 놓았을 때 단일시점의 관점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변칙적인 결과를 십분 활용했다.

[산 로마노의 전투] 1918, 캔버스에 유채, 65×55cm, 밀라노 시립 예술 컬렉션
[산 로마노의 전투] 1918, 캔버스에 유채, 65×55cm, 밀라노 시립 예술 컬렉션

 

화면 중앙을 차지하는 석고형들과 그 그림자를 보면 우첼로의 속 병사들의 헬멧을 연상할 수 있다. 이 석고형들은 두 개의 사뭇 다른 축을 중심으로 작용한다. 

그림자의 가장자리로 대변되는 하나는 어디까지나 관점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즉 석고형들의 중앙을 꿰뚫는 가상의 축도 같은 길이이다. 이러한 장치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똑같이 이상화된 공간을 차지하게하는 한편, 보다 복잡한 형태를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도록 해 준다.

#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이탈리아 정치와 예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밀려온 볼셰비즘의 파도에 겁에 질린 많은 이탈리아 중산층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처럼 모란디 역시 정치적으로 우파에 섰다. 1913년에 이미 미래파들의 모임에 참석했으며 이듬해 로마의 스프로비에리 화랑에서 열린 첫 번째 미래파 전시회에도 참여했다. 

모란디가 정확하게 언제 파시스트당에 합류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1920년대 초반, 즉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수년 전에 이미 무솔리니의 지지자였으며 파시스트의 정식 당원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모란디는 또 이탈리아 문화생활을 전격적으로 개조하고자 했던 파시스트 ‘혁명’을 신조로 하는 예술가들과 지성인들의 모임 ‘스트라파에제 Strapaese’의 창립 멤버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결국 파시즘에 환멸을 느끼고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돌아선 후, 모란디는 1930년대 초 이래로 정치적인 발언을 중단했으며 교사와 화가로서의 일상 이외에는 공적인 자리를 점점 피하게 되었다. 

그의 오랜 친구-또한 파시스트 당원이자 화가, 교사이기도했던 - 루이지 바르톨리니가 1939년 파시스트 기관지 콰드리비오(Quadrivio)에서 공개적으로 모란디를 공격했 음에도 불구하고, 모란디가 최종적으로 파시즘을 부정했는 지를 증명할 만한 증거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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