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오키프(1887-1986)

[검은 붓꽃]  1926, 캔버스에 유채, 91.4×75.9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검은 붓꽃] 1926, 캔버스에 유채, 91.4×75.9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1887년 위스콘신주 선프레리에서 태어났다.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와 뉴욕아트스튜던츠리그에서 수학했다. 1908년 학교졸업 후 화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미술교사가 되었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오리엔탈리즘 화가인 아서웨슬리다우의 영향을 받았다. 계속 교사로 일하다가 1916년 뉴욕에 화랑을 소유하고 있던 유명사진작가 알프레드스티글리츠를 만난다. 스티글리츠는 1917년 자신의 291화랑에서 그녀의 첫번째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평원에 쏟아지는 빛 No. II ] 1917, 종이에 수채, 30×22cm, 포트워스, 아몬 카터 미술관
[평원에 쏟아지는 빛 No. II ] 1917, 종이에 수채, 30×22cm, 포트워스, 아몬 카터 미술관

 

오키프는 1946년 스티글리츠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욕에서 그와 함께 살며 작업 활동을 계속했다 (두 사람은 1924년 결혼했다). 그 후 뉴멕시코주 애비퀴우에 지은 고스트랜치하우스로 이주했다. 

시력이 감퇴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 작품활동은 중단했지만, 1986년 9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드로잉과 수채화, 작은 조각 오브제들은 계 속해서 제작했다.

291화랑에서 열린 오키프의 첫 번째 개인전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단순화한 ‘추상’ 풍경화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키프는 당시 텍사스의 한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이 무렵의 그림들은 모두 텍사스 평원의 거대하고 만물을 싸안는 듯한 평면성-나지막한수평선과 광활한 하늘-을 재현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오키프 예술-<검은 붓꽃>을 포함해서-에 대한 해석상의 논쟁은 이때의 풍경화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빨간 칸나 ]1924년경, 압착 목판 위에 올린 캔버스에 유채, 91×75.5cm, 투손,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 미술관
[빨간 칸나 ]1924년경, 압착 목판 위에 올린 캔버스에 유채, 91×75.5cm, 투손,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 미술관

 

몇몇 평론가들은 이 풍경들이 회화 공간에 대한 새로운, 미국 고유의 접근을 대변한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이 풍경들이 마치 자궁과도 같으며, 따라서 여성성의 정수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작가인 오키프 자신은 ‘그저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오랫동안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오리엔탈리즘을 빌려 그린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상의 논쟁은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오히려 1926년부터 <검은붓꽃>을 시작으로 잇따라 내놓은 식물 연작과 1930년대에 발표한 총 6점의 <천남성> 연작으로 더욱 거세게 달아올랐다. 사실 <검은 붓꽃>이 성적으로 강렬한 그림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란 매우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제목대로 단순히 검은 붓꽃일 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활짝 열린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적이고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더욱이 두 번째 해석의 성적암시를 상쇄하기는 커녕 작품의 거대한 사이즈로 인해 오히려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오키프의 식물화의 크기나 그 순수한 강렬함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아서 웨슬리 다우가 자신의 학생들에게 즐겨시켰던 교수방법의 하나는 꽃을 눈 가까이에 대고 봄으로써 그 색채 감각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거의 숨이 막힐 듯한 <검은 붓꽃>의 근접감과 그 얇은 깊이감으로 보아 이때의 경험을 되살린 것일 수도 있다. 
 

[천남성 No. IV ] 1930, 캔버스에 유채, 101.6×76.2cm,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천남성 No. IV ] 1930, 캔버스에 유채, 101.6×76.2cm,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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