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1907-1954)

[헨리 포드 병원 ]1932, 메탈에 유채, 31.2×39.4cm, 멕시코시티, 돌로레스 올메드 파티노 미술관
[헨리 포드 병원 ]1932, 메탈에 유채, 31.2×39.4cm, 멕시코시티, 돌로레스 올메드 파티노 미술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1907년 멕시코시티 외곽의 작은마을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여섯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1922년 명문 국립 예비학교에 입학 했으며 이곳에서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처음 만났다. 

1925년 칼로가 타고 있는 버스가 트롤리 전차에 들이받히는 사고가 일어나고, 척추골절에 골반과 오른발이 으스러지고 오른쪽 다리 여러군데에 금이 가는 심각한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내면의 고통은 임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생 그녀는 극심한 발작성 통증으로 고통받았으며 등과 오른쪽 다리에 삼십여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칼로는 사고 후 병원에서 회복기를 보내면서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작품들은 하나같이 그녀 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두 프리다] 1939, 캔버스에 유채, 173×173cm, 멕시코시티 국립 근대 미술관
[두 프리다] 1939, 캔버스에 유채, 173×173cm, 멕시코시티 국립 근대 미술관

1929년 칼로는 리베라와 결혼했다. 그야말로 폭풍 우와도 같은 관계였다. 리베라가 충동적인 방랑자였다면 칼로는 대놓고 양성애자였다. 1954년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은 때때로 초현실주의라는 오해를 받는다. 

사실 칼로는 그녀의 평범하지 못한 삶의 사건들, 더 나아가 여성으로서의 삶에 초점을 맞춘 상징주의자였다. 훗날 스스로 고백했듯 칼로는 자신이 아이를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한동안 받아들이지 못했고,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지 7년 후에 완성한 <헨리포드 병원>에서 그녀는 여러 번의 유산을 겪고 병원 침대위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칼로의 침대는 공중, 머나먼 산업국 미국의 파워와 그녀의 조국 멕시코 사이 어딘가(즉 근대사회와 전근대사회 사이)에 떠 있다. 
그림 속 칼로의 위와 아래로는 그녀가 손에 모아 쥔 붉은 줄로 연결된 여섯가지 상징이 보인다. 맑은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보이는 세가지는 현실화된 그녀의 꿈이다. 

그녀가 소원했던 의학적 구원, 그녀의 조상들 그리고 그녀 자신의 육체, 땅에 놓여 있는 나머지 세 가지는 시험, 유혹, 그리고 타락과 죽음이다. 

칼로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듯이, 주제를 다룰때 그녀가 보여주는 솔직함은 이미지 요소들의 배열속에 깃들어 있는 거의 순진하다 해야 할 교훈성으로 인해 그 강렬함이 배가되었다. 남편인 리베라처럼 칼로 역시 과격파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발하게 참여했다. 

칼로의 예술은 교육을 거의 혹은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조차 보고 이해하기가 쉬웠으며, 또 그것이 그녀가 아메리카 인디언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화와 상징적 언어, 그리고 내러티브 방언을 사용한 이유이기도하다.
 

[ 작은 사슴 ], 1946, 메소나이트판(압착한 목질 섬유판)에 유채, 22.5×30.5cm,개인 소장
[ 작은 사슴 ], 1946, 메소나이트판(압착한 목질 섬유판)에 유채, 22.5×30.5cm,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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