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임 수틴 (1893-1943)

[세레  풍경 ]   1922년경, 캔버스에 유채,  74×7 5cm,  볼티모어  미술관
[세레 풍경 ] 1922년경, 캔버스에 유채, 74×7 5cm, 볼티모어 미술관

 

샤임 수틴 Chaim Soutine 은 1893년 오늘날 벨라루스공화국의 민스크 근교, 스밀로비치시의 유대인 게토ghetto (유대인 거주지)에서 태어났다.
민스크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Vilnius 미술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운 뒤 1913년 파리로 이주해 에콜데 보자르에서 화가 페르낭 코르몽휘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라뤼세La  Ruche’ 그  유명한  ‘벌집’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샤갈,  레제,  모딜리아니의  이웃이  되었다.  수틴의  초기작은  비록  남아  전해   내려오는   작품은 거의 없지만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틴은  야수파가  요구하는  정형화된  색채 해석을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감정적이었다.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로  몇번이나 자 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당국에  등록된  유대인이었던  그는  게슈타포에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여  관속에 숨어 파리를  떠났다.

전쟁 기간 내내  그는  시골마을  샹피니-쉬르-보드에 숨어 살았다.  1943년  방치된 위궤양이  악화해  파리의 한병원으로  실려와  응급 수술을  받은 뒤 세상을 떠났다.

[세레풍경] 1919년경, 캔버스에 유채, 53.5×65.5cm, 개인 소장
[세레풍경] 1919년경, 캔버스에 유채, 53.5×65.5cm, 개인 소장

이 작품은 프랑스쪽피레네산맥의 작은 마을 세레에서 살면서 작업활동을 했던 3년간 제작한 일련의 풍경화중 하나이다.

이 작품들은 2년 후카뉴에서 작업한 녹색으로 빛나는 살짝 바람에 휩쓸린 듯한 풍경화-수턴의 대표작에 비교하면 매우 다른 훨씬 정열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두껍고 평행적인 붓질로 빨강, 주황, 황토색 등 사이로 보랏빛을 띤 검정이나 짙은 회색을 쓱쓱 칠한 덕분에 수틴의 산지 풍경중에서도 가장 스페인풍이 두드러진다.

수틴은 피레네 산맥에서 공간과 형태를 묘사하는 완전히 다른기법을 발전시켰다.
관객의 시점이 끝없이 바뀌면서 사물 사이에 시각적 연대를 만들 때, 공기처럼 가벼운 관점은 인공적으로 보인다. 이로써 자신이 본것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규율에 덜매인 반응을 풀어 놓을 수 있었다.
 

[세레풍경] 1920-21년경, 캔버스에 유채, 54×73cm, 신시내티미술관
[세레풍경] 1920-21년경, 캔버스에 유채, 54×73cm, 신시내티미술관

 

작품들은 인식의 과정보다는 보는 ‘행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불안하고 어질어질한 느낌을 지니고 있다. 공간을 가로질러 구르는 속에서 잡아낸 풍경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작품에서 사실적인 관찰의 힘이 느껴진다.

수틴은 흔히 ‘유대 표현주의 화가’로 불리는데 두가지 모두 세심한 주의를  요구한다.  수틴은  브뤼케파나 청기사파에서  느껴지는 지극히 지성적이고, 전략적인 방향  제시를 동반한 표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내부에서  끓어  오르는 감정적 힘을  깊이 느끼고 있다고  해야  더 정확하다.  즉 표현주의의  ‘표현’이 도를  넘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또 특징적인  접근면에서 다른 유대인 화가들,  예를들면  오스카  코코슈카나  데이비드 봄버그,  그리고 더욱 최근에는  영국화가  레온코스프와  프랭크 아우어바흐등과 연결지어지기는 하나 수틴에게서 특별히  유대인화가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의문이다.

# 수틴과 반스 박사
〈세레 풍경〉 은 미국의 수집가 앨버트 C. 반스가 1922~23년에 두 차례에 걸쳐 수틴의 스튜디오에서 한꺼번에 사들인 52점의 작품 중 하나이다.
반스는 이 가운데 몇몇은 자신의 개인컬렉션을 위해 따로 골라내고 나머지는 뉴욕과 파리의 화상에게 팔았다.

덕분에 반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세레시절의 작품을 다수 지킬 수 있었다.
수틴은 세레를 떠나기 직전 그곳에서 그린 그림들을 대거 파괴했으며 파리로 돌아온 후에도 상당수를 없애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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