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 미로 (1893-1983)

[풍경] 1927, 캔버스에 유채, 129.9×195.5cm, 캔버라,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
[풍경] 1927, 캔버스에 유채, 129.9×195.5cm, 캔버라,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

호안미로(Joan Mir )는 1893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3년간 라론하 산업미술&순수미술고등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동시에 상업학교에 다니면서 졸업 후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신경 쇠약을 일으켜 일을 그만두고 난 뒤 프란세스갈리의 예술학교(1912-15)에서 공부했다. 1920년 처음으로 파리를 여행한 뒤 1921년 아예 파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1924년 이후 앙드레 브르통과 그 주위의 예술가, 작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 중에는 막스 에른스트와 앙드레 마송 등도 있었다. 그러나 브르통의 엄격한 성격과 맞지 않았던 미로는 초현실주의에 가담하지 않고 계속 예술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지켰다. 

[채소밭과 당나귀 ] 1918, 캔버스에 유채, 64x70cm, 스톡홀름 근대 미술관
[채소밭과 당나귀 ] 1918, 캔버스에 유채, 64x70cm, 스톡홀름 근대 미술관

1940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제2차 세계대전동안 스페인에 머물렀다. 
1941년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최초의 대규모 국제회고전을 열었으며 1956년에는 유명한 모더니즘 건축가 호세루이스서트에게 팔마 데 마요르카에 집과 스튜디오를 지어줄 것을 의뢰했다. 1983년 팔마 데 마요르카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미로는 20대 중반부터 이미 전통적인 회화가치나 기법을 사용하는 데 강하게 저항했다. <채소밭과 당나귀>(1918)나 <실내: 라 마소베라>(1922) 같은 1918년부터 1923년 사이에 제작한 조형 회화는 이미 미로가 눈에 보이는 환영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대신 이 작품들은 장식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반복적인 요소들을 평면적인 회화 공간 안에 배치하고 있다. 
 

[무희 Ⅱ ] 1925, 캔버스에 유채, 115.5×88.5cm, 개인 소장
[무희 Ⅱ ] 1925, 캔버스에 유채, 115.5×88.5cm, 개인 소장

1925년 미로가 <서커스말>과 <무희>를 그렸을 때, 미로의 그림에서는 ‘실제 지형 을 가리키는 모든 요소가 사라졌었으며, 미로는 회화 공간을 개방하여 하나의 통일 된 색면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상 미로는 미국 회화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형태면’ 회화를 시작한 것이다. 

1928년 미로는 전통 장르의 축소판을 실험해보기로 하고 ‘네덜란드’ 실내(그 중에는 얀 스테인 모작도 있다)와 여섯 점의 몬트로이그(바르셀로나 근교에 있는 미로의 고향마을) 풍경을 그렸는데, 여기에서는 캔버스를 수평으로 분할하여 각각 고유의 형태를 지닌 두 개의 인접한 색면으로 나타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풍경>(혹은 <토끼와 달이 있는 풍 경>에서는 미로가 가장 좋아하는 두가지색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드넓은 무미건 조한 레드위로 부드러운 코발트블루의 커튼이 내려앉는다. 각각의 색 영역에는 특 별한 생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푸른색 영역에는 미로가 ‘빛나는 달걀’이라 묘사한 달이 가장 섬세한 선으로 지구 에 매여 있고 붉은 영역에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토끼의 머리가 있다. 미로는 훗날 이 이미지가 실제 풍경, 구체적으로 밝히면 조부의 고향인 코르누데야 근교의 붉은 토양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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