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 미로 (1893-1983)
호안미로(Joan Mir )는 1893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3년간 라론하 산업미술&순수미술고등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동시에 상업학교에 다니면서 졸업 후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신경 쇠약을 일으켜 일을 그만두고 난 뒤 프란세스갈리의 예술학교(1912-15)에서 공부했다. 1920년 처음으로 파리를 여행한 뒤 1921년 아예 파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1924년 이후 앙드레 브르통과 그 주위의 예술가, 작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 중에는 막스 에른스트와 앙드레 마송 등도 있었다. 그러나 브르통의 엄격한 성격과 맞지 않았던 미로는 초현실주의에 가담하지 않고 계속 예술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지켰다.
1940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제2차 세계대전동안 스페인에 머물렀다.
1941년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최초의 대규모 국제회고전을 열었으며 1956년에는 유명한 모더니즘 건축가 호세루이스서트에게 팔마 데 마요르카에 집과 스튜디오를 지어줄 것을 의뢰했다. 1983년 팔마 데 마요르카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미로는 20대 중반부터 이미 전통적인 회화가치나 기법을 사용하는 데 강하게 저항했다. <채소밭과 당나귀>(1918)나 <실내: 라 마소베라>(1922) 같은 1918년부터 1923년 사이에 제작한 조형 회화는 이미 미로가 눈에 보이는 환영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대신 이 작품들은 장식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반복적인 요소들을 평면적인 회화 공간 안에 배치하고 있다.
1925년 미로가 <서커스말>과 <무희>를 그렸을 때, 미로의 그림에서는 ‘실제 지형 을 가리키는 모든 요소가 사라졌었으며, 미로는 회화 공간을 개방하여 하나의 통일 된 색면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상 미로는 미국 회화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형태면’ 회화를 시작한 것이다.
1928년 미로는 전통 장르의 축소판을 실험해보기로 하고 ‘네덜란드’ 실내(그 중에는 얀 스테인 모작도 있다)와 여섯 점의 몬트로이그(바르셀로나 근교에 있는 미로의 고향마을) 풍경을 그렸는데, 여기에서는 캔버스를 수평으로 분할하여 각각 고유의 형태를 지닌 두 개의 인접한 색면으로 나타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풍경>(혹은 <토끼와 달이 있는 풍 경>에서는 미로가 가장 좋아하는 두가지색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드넓은 무미건 조한 레드위로 부드러운 코발트블루의 커튼이 내려앉는다. 각각의 색 영역에는 특 별한 생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푸른색 영역에는 미로가 ‘빛나는 달걀’이라 묘사한 달이 가장 섬세한 선으로 지구 에 매여 있고 붉은 영역에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토끼의 머리가 있다. 미로는 훗날 이 이미지가 실제 풍경, 구체적으로 밝히면 조부의 고향인 코르누데야 근교의 붉은 토양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