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미르 말레비치 (1878-1935)

[ 검은 정사각형 ] 1915, 캔버스에 유채, 80×80cm, 모스크바,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 검은 정사각형 ] 1915, 캔버스에 유채, 80×80cm, 모스크바,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카지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는 1878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동네의 드로잉학교를 다니다가 모스크바로 이주, 1904년부터 1910년까지 모스크바 회화조각건축학교에서 수학했다.

친구인 알렉산드라 엑스테르, 블라디미르 타틀린등과 함께 청년 연합은 물론 모스크바의 예술가 모임 ‘당나귀 꼬리’ 와도 전시회를 열었다. 

1914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출품했으며 절대주의 선언이라 할 수 있는 『입체주의에서 절대주의로』를 저술했다. 

재능을 갖춘 헌신적인 교사이기도 했던 말레비치는 벨로루시의 비테브스크 실용 미술학교, 레닌그라드 예술 아카데미, 키예프 국립 예술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1926년 근대미술에 대한 유명한 논문인 『비구상 세계』를 출간했다. 스탈린 정권의 탄압으로 1935년 레닌그라드에서 가난 속에 세상을 떠났다.

절대주의의 목적은 말레비치가 자신의 1915년 선언문에서 밝혔듯, ‘예술에 대한 생각, 컨셉, 이미지’들 을 모두 버리고 ‘느낌외에는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는 사막’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검은 원] 1923-29, 캔버스에 유채, 79×79cm, 개인소장
[검은 원] 1923-29, 캔버스에 유채, 79×79cm, 개인소장

 

이것은 말레비치가 당대의 주요 아방가르드운동- 입체파와 미래파-의 가르침을 발굴하고, 재생시키고, 완전하게 흡수한 기나긴 견습 시절을 통해 마침내 현실화되었으며, 필연적으로 말레비치가 ‘비구상 예술’이라고 부른 진화의 그 다음 단계가 되었다. 

주요한 선구작은 말레비치가 우크라이나의 작은 마을 스콥트시에서 소작농, 수공업자들과 어울리며 다른 절대주의 예술가들과 함께 활동하던 시절인 1915년에 선보인 <검은 정사각형>이었다. 이 작품에는 숨김도 복잡함도 없다. 그저 제목에 나와 있는 그대로다.

하얀 바탕 위에 놓여 있는 검은 정사각형, 세심하게 처리한 표면과 칼로 자른 듯 명료한 가장자리, 말레비치가 이 작품에 부여한 중요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말레비치가 말한 ‘느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말레비치에게 세상의 문제란, 우리가 볼 수 있듯 그 고의적인 혼란, 사물과 사고의 혼재를 표명하려는 경향이다. 

말레비치는 이 세상 너머 어딘가 -그리고 구상적인 세계에서 태어난 사고의 영역 바깥 어딘가-에 스스로를 ‘비구상적인 느낌’이라 드러내는 완전히 다른 경험의 질서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느낌’은 우주의 공허를 바탕으로 그와 대조를 이루는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표현된다.
 

[4개의 정사각형 ]  1915, 캔버스에 유채, 49×49cm, 사라토프, A.N. 라디셰프 국립미술관
[4개의 정사각형 ] 1915, 캔버스에 유채, 49×49cm, 사라토프, A.N. 라디셰프 국립미술관

말레비치는 이러한 대안적 질서를 단순한 공식으로 묘사했다. ‘검은 정사각형 = 느낌, 흰 바탕 = 이 느낌 너머의 공허’ 그는 <검은 정사각형> 이후 <검은 원> (1923-29), <4개의 정사각형>(1915) 등 절대주의적인 구성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말레비치는 모두 4가지 버전의 <검은 정사각형>을 제작했다. 

첫 번째 버전(1915)과 세 번째 버전(1929)은 트레 티야코프 미술관에, 두 번째 버전(1923)은 상트페테르 부르크의 러시아 국립미술관에, 그리고 1913년이라는 제작연도가 뒷면에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지막 버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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