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데 키리코 (1888-1978)

[붉은 탑 ] 1913, 캔버스에 유채, 73,5×100.5cm,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붉은 탑 ] 1913, 캔버스에 유채, 73,5×100.5cm,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알베르토 (사비니오로 개명)의 형인 조르조 데 키리코 Giorgio de Chirico는 그리스 볼로스의 이탈리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집에서 어머니의 감독아래 고대 역 사, 어학, 그리스 신화에 중점을 둔 기본 교육을 받았다. 또한 그리스 정부에 고용된 철도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로부터 공학 드로잉의 다양한 시스템을 배웠다. 

데 키리코는 아테네의 고등미술학교에서 드로잉과 회화를 배운 뒤 뮌헨의 회화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피렌체의 예술 아카데미에서 상징주의 화가들-스위스 태생의 아르놀트 뵈클린과 독일화가 막스클링커- 니체 철학에 빠지기도 했다.

<붉은 탑>은 흔히 ‘피아차 시기’-니체에 심취해 있었던 1910년부터 1913년까지-라고 불리는 무렵에 탄생한 작품이다. 이 시기의 가장 초기작품들은 봐클린의 심상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데 키리코가 니체에게 빠져들며 ‘분위기’ 혹은 ‘무드’를 의미하는 ‘슈팀뭉 Stimmung’의 개념을 이해하면서 이러한 유대는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피아차(이탈리아어로 ‘광장’이라는 뜻 역주)는 그 질서 정연한 연주들 사막과도 같은 개방된 공간과 매우 독특한 ‘슈팀뭉’ 그림자를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정오나 땅거미 가 내리고 길게 뻗은 그림자가 신비로운 어둠을 만들어내는 늦은 오후에 볼 수 있는 -과 더불어 ‘형이상학적 묵시’ 를 위한 완벽한 배경으로 보인다. 

탑은 이러한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소재이지만 프로이트가 제시한 무의식적인 남근 숭배의 에너지보다는 초월 의 힘-니체의 ‘힘을 향한 의지’-을 상징한다.

무대와도 같은 오페라적인 공간, 깊이 파고드는 햇빛, 좌우 대칭적인, 거의 종잇장처럼 얇은 건축물, 거짓된 혹은 인위적인 관점, 수평선을 향해 드라마틱하게 빛나는 구 름 한 점 없는 짙푸른 하늘 붉고 누런 색조의 풍경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유개차와 몸체가 잘려 버린 기념물등 이 시기 데 키리코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특징은 <붉은 탑>에서 거의 다 찾아볼 수 있다.
 

[ 괴이한 시간의 환희와 수수께끼 ], 1913, 캔버스에 유채 129.5×83.5cm, 개인 소장
[ 괴이한 시간의 환희와 수수께끼 ], 1913, 캔버스에 유채 129.5×83.5cm, 개인 소장

 

니체를 추모하며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피아차 카를로 알베르토)에 지금도 서 있는 카를로 알 베르토 기마상의 실루엣은 데 키리코의 <붉은 탑>과 니체를 절대적 으로 연결하는 꾼이다. 

사실 이 기마상의 존재로 인해 이 작품이 대철학자에게 바치는 경의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부터 시작하는 카를로 알베르토 가(街)는 니체가 토리노에서 머무는 동안 거주했던 곳이며 또한 그의 마지막 대작이라 평가받는 「여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888)를 저술한 장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은 1889년 니체가 광기에 빠져 들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곳이었다. 
 

[시인의 출정 ]  1912, 캔버스에 유채, 66×86cm, 개인 소장
[시인의 출정 ] 1912, 캔버스에 유채, 66×86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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