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슈미트 로틀루프 (1884-1976)

[해변에서 물놀이 하는 네 사람] 1913, 캔버스에 유채, 88×101cm, 하노버 슈프랭겜 미술관
[해변에서 물놀이 하는 네 사람] 1913, 캔버스에 유채, 88×101cm, 하노버 슈프랭겜 미술관

 

1884년 출생한 카를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oid Rontatt는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친구이자 브뤼케파의 창립 멤버중 한 사람이다. 
브뤼케파의 사상적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멤버였으나 그는 이미 10대 때 헨리크 입센과 요한아우구스트스트린 드베리를 취했으며 니체의 저서에 통달해 있었다. 특별히 활동적인 회원은 아니었다. 그는 단체 활동을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1911년 르히너보다 앞서 베를린으로 이주했으며 함부르크에도 작은 작업실을 차렸다. 1976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브뤼케파 후기 작품 브뤼케파는 이 작품이 완성된 지 얼마 되지않은 1913년 5월에 해제되었다. 그중 하나인 <해변에서 물놀이하는 네 사람>은 슈미트로틀루프의 전성기를 대변한다.

슈미트 로틀루프는 야외에서 누드를 연구하고 풍경화를 그리며 여름을 보내곤 하던 당가스트라는 마을 주변의 시골 풍경을 매우 사랑했다. 
그는 도회지소재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므로 이러한 해변에서 겨우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시각적 소재들을 수집하곤 했다. <해변에서 물놀이 하는 네사람>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태어난 전형적인 작품으로 야외에 나가 그린 것이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구상했다. 

[당가스트 풍경] , 1910, 캔버스에 유채, 76×84cm,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당가스트 풍경] , 1910, 캔버스에 유채, 76×84cm,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당가스트 풍경>(1910)에서 볼 수 있는 모티프들과는 달리 특별한 관점이란 것도 없고 인물들 역시 1912년 당가스트에서 그린 <몸단장하는 소녀> 같은 개별적인 인물화에 나타나는 단절감이 느껴진다. 

<해변에서 물놀이 하는 네사람>을 그리기 바로 전 해에 슈미트로블루프는 쾰른에서 열린 존더분트 (Sonderbund) 전시회에 참여, 피카소와 브라크 같은 입체작품들을 보고는 함부르크로 돌아와 아프리카화한 입체 형태를 실험한 일련의 작품들을 내놓았다.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그의 인물화는 <두 여인 >(191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져와 윤곽이 분명해졌으며 얼굴은 마스크와 비슷해졌다. 
이러한 흔적이 <해번에서 물놀이하는 네 사람>에도 남아 있지만 음악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는 듯한 형태의 순환하는 흐름과 높은 색채 대비로 인해 훨씬 부드러워진 모습이다.

[두 여인 ], 1912, 캔버스에 유채, 76×84cm, 런던, 테이트 컬렉션
[두 여인 ], 1912, 캔버스에 유채, 76×84cm, 런던, 테이트 컬렉션

 

 

브뤼케파의 해체 집합성의 거부
브뤼케파의 핵심 멤버들은 처음 만났을 당시 모두 20대 초반이었다. 이들의 초기 목적은 그저 단순히 함께 살면서 작업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청춘의 창의력을 이용하여 사회생활을 변형하고자 했다. 그들의 초창기 한 생각이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모든 젊은이를 부른다.- 그리고 미래를 짊어진 젊은이로서 우리는 오랜 기득권에 저항하여 우리의 손과 삶을 위한 자유를 얻기를 원한다. 즉각적이고 솔직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자극을 주는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이는 우리와 한편이다.’ 

그러나 사회적 이상 공동체로 시작한 이들의 모임은 비슷비슷한 분위기의 반규격화된 미적 프로젝트로 변하고 말았다. 
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멤버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브뤼케파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1913년 5월, 키르히너가 스스로를 브뤼케파를 이끄는 스타일 메이커이자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자칭한 브뤼케파 연감을 출간하면서 브뤼케파는 완전히 해제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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