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 (1887-1968)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 ] 1912, 캔버스에 유채, 146×89cm,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 ] 1912, 캔버스에 유채, 146×89cm, 필라델피아 미술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1887년 노르망디의 블랭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무사였고 외할아버지는 화가이자 조판가였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뒤샹은 물론 그의 두 형까지 모두 예술가의 길을 택했다. 큰형인 가스통(화가)은 자크 비용, 작은형인 레이몽(조각가)은 뒤샹 비용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마르셀 뒤샹은 1904년 줄리 앙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기 위해 파리로 와 자크 비용과 함께 지냈다. 

1909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작품을 공개했다. 이때 입체파인 알베르 글레즈 장 메쳉제 페르낭 레제는 물론 프란시스 피카비아와도 만나게 되는 데, 특히 피카비아는 평생의 벗이 된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를 그린 1912년이 예술가로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의 사고가 중대한 변화를 맞은 것은 1911년 <기차에 앉아 있는 슬픈 젊은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잽싼 나체들에 들러싸인 왕과 여왕] , 1912,  캔버스에 유채, 114.5×128.5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잽싼 나체들에 들러싸인 왕과 여왕] , 1912, 캔버스에 유채, 114.5×128.5cm, 필라델피아 미술관

1912년 뒤샹은 미술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4점의 캔버스화를 제작했다. 그 중 첫 번째인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는 연초에 뒤를 이어 봄에는 <잽싼 나체들에 둘러싸인 왕과 여왕>이 나왔는 데, 특히 후자는 뒤샹이 가장 아낀 작품이다. 여름에는 <처녀에서 신부로>와 <신부>가 탄생했다.

에티엔-쥘 마레, [달리는 남자 ](부분), 1886-90, 동체 사진
에티엔-쥘 마레, [달리는 남자 ](부분), 1886-90, 동체 사진

이후 뒤상은 단 4점의 회화두 버전의 <초콜릿 가는 사람>(각 1913/1914)과 <두절의 네트워크〉(1914), 그리고 의뢰를 받아 제작한 <너는 나를>(1918)-만을 더 남겼다. 
‘기성작 readymade’의 시초라 여겨지는 -물론 당시에는 아직 그러한 명칭이 없었지 만- <자전거 바퀴>는 1913년에 탄생했으며 이듬해에 <약국>과 진정한 최초의 기성작인 <병들을 늘어놓은 선반>이 나왔다. 

뒤샹에게 있어 기성작의 출발은 그때까지 회화가 의존해 왔던 기술에 바탕을 둔 미학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림으로써 기능성으로서의 회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1953년 해리 엇, 시드니, 앤드 캐롤 제니스와 가진 미출간 인터뷰에서 말했듯, 기성작은 그에게 ‘미적인 숙고가 더는 손의 능력이나 재주가 아닌 정신의 선택에 불과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뒤샹이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의 두번째이자 최종 버전인 이 그림을 그릴 무렵 그는 이미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자체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망막의 몸서리’라 부른 것에 대한 반대, 즉 다른 말로 하면 종교적, 철학적, 윤리적 아이디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회화의 전통적 기능이 아닌 단순한 시각적인 무엇으로의 회화의 격하에 착수하고 있었다.

이를 감안하면 우리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 에서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쟁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것들은 직접적으로 어떤 것들은 은유적으로 나타 나있다. 
에티엔-쥘 마레의 인체 움직임의 사진학적 해부는 그대로 눈앞에 드러난다. 분석입체파에 대한 작가의 관심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의 스튜디오에 들락거리면서 발견한 억제된 그러면서도 솔직한 색채의 활용에 잘 나타나 있다. 또 뒤상은 수학에도 지속적인 흥미를 보였다. 

1910년에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 원리 Principia Mathematica』 제1권이 출간되었다. 제2권은 1912년에 나왔는데 현상에 대한 메타논리학적 접근을 위한 포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쿠르트 괴델이 훗날 지적했듯, 『수학 원리』 이후 ‘더 이상 하나의 결정 문제는 없다. 매분마다 점점 더 많은 결정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 속 남자는 마레가 만든 경사를 걸어 내려가는 남자의 동체 사진과 같이 축적된 이미지이다. 나체는 그림을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가로질러 ‘이동 중’ 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구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은유적인 시사는 끝없는 반복과 영속하는 동작에 대한 것인 동시에 아래로 달려가는 에너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 주저하는 입체파
뒤샹은 1910년부터 1912년까지 파리의 입체파 화가들의 지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상당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입체파가 지향하는 예술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회의 를 느끼고 있었다. 

뒤샹은 입체파(큐비즘)를 ‘시각주의’라는 역사적인 나사의 또 한번의 회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입체파의 ‘색채 조화’는 인정하였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약간 다른 형식’을 적용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뒤샹은 미래파에 대해서는 ‘도시의 인상파’라며 공개적인 경멸을 감추지 않았으나 초현실주의에 대해서는 완전하는 아니어도 시각적인 것에 대항한다’ 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의 지지는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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