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 (29)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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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0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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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세잔Ⅱ-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위대한 종합
‘자연과의 접촉’에서 회화의 영감을 얻는 것은 인상주의의 성과였다. 결국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성과를 보존하되 그것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고전주의로 복귀하는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고흐나 고갱이 종종 대상의 둘레에 두꺼운 윤곽선을 둘렀던 것을 생각해보라. 퐁타벤 화파에서 유래한 이 클루아조니슴은 실은 인상주의의 원칙에 위배된다. 인상주의가 그리려 한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서 반사되는 빛이었다. 피사로가 윤곽선을 포기하라고 가르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잔이 그리려 한 것은 ‘사물 자체’였다. 그는 고흐와 고갱이 색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삼원색을 사용한 것처럼 형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기하학적 원형으로 돌아간다.

“자연을 원통·구체·원뿔로 다루되 모든 것을 원근법 속에 집어넣어 한 대상 혹은 한 평면의 각 측면이 중심점으로 향하게 하라.”

<빨간 팔걸이 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의 초상>(그림5)을 보자.

그림5. 빨간 팔걸이 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의 초상, 폴 세잔, 1877년
그림5. 빨간 팔걸이 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의 초상, 폴 세잔, 1877년

여인의 신체가 기하학적 입체에 가깝게 처리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하학적 환원의 경향은 그의 다른 초상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이처럼 대상을 기하학적 볼륨으로 단순화한 것은 미술사에서 세잔이 최초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렇게 ‘자연을 원통·구체·원뿔로 다루’는 것은 현대 추상회화의 원리이기도 하다. 인체를 기하학적 도형이나 입체로 처리하는 경향은 예를 들어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cubisme), 페르낭 레제의 튜비즘(tubisme), 그리고 레제의 영향을 받은 말레비치의 초기 작품 등 현대미술의 여러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한편, ‘대상 혹은 평면의 각 측면’을 분석적으로 다루는 것은 입체주의에 속하는 특성이다. 이즈음에 세잔은 스스로 ‘아름다운 모티브(beau motif)'라 부른 생트 빅투아르산을 반복해서 그리기 시작한다.<고가교가 있는 풍경>(그림6)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 빅투아르산>(그림7) <생트 빅투아르산>(그림8)

그림6. 고가교가 있는 풍경, 폴 세잔, 1885~1887년
그림6. 고가교가 있는 풍경, 폴 세잔, 1885~1887년
그림7. 커다란 소내무와 생트 빅투아르산, 폴 세잔, 1887년
그림7. 커다란 소내무와 생트 빅투아르산, 폴 세잔, 1887년
그림8. 생트 빅투아르산, 폴 세잔, 1902~1904년
그림8. 생트 빅투아르산, 폴 세잔, 1902~1904년

이 연작은 그가 사망하는 1906년까지 이어진다. 1885년에 시작한 그림과 1887년의 그림, 생의 말년인 1900년 이후의 그림들은 그가 인상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저만의 언어를 구축한 후 원숙한 형태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세잔은 하나의 산을 형태·공간·구조가 중첩된 모습으로 파악하고 개개의 단면을 벽돌처럼 쌓아올리는 식으로 화면을 구축해 나가는데, 그 방식이 공간을 단면(facette)들로 분해해 처리하는 입체주의의 분석적 단계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입체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열었지만, 세잔 자신이 입체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모든 것을 원근법 속에 집어넣어”라든지 “중심점으로 향하게 하라.”라는 표현은 세잔과 입체주의자들 사이에 가로놓인 커다란 간극을 보여준다.

 입체주의가 ‘단일 시점’에 입각한 묘사라는 원근법의 규약을 폐기했다면, 세잔은 사실상 원근법을 폐기하고도 여전히 화면이 원근법적 공간처럼 보기를 원했다. 한마디로 원근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유형의 원근법으로 대체한 것이다.
여기서 세잔은 현대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지만, 그의 발은 그 문턱을 넘지 않고 여전히 자연의 진실한 묘사를 추구하는 ‘고전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세잔의 회의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산의 풍경, 목욕하는 여인들, 사과가 있는 전물과 주변 인물들의 초상을 주로 그렸다. 그는 하나의 모티브를 택하면 수없이 반복적으로 그리곤 했다. 조금만 자리를 옮겨도 자연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자연의 걸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세잔은 “무한한 다양성”이라고 대답한 바 있다. 사실 같은 모티브를 반복해서 그리는 것은 이미 보네와 같은 인상주의자들도 했던 일이다. 하지만 세잔이 같은 모티브를 반복적으로 그린 것은 인상주의자들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였다. 어느 편지에서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은 내가 끊임없이 같은 주제로 돌아오는 것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자연의 습작을 통해 논리적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것을 믿습니다. 기술적 문제들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요.”

인상주의자들이 하나의 모티브를 반복적으로 그린 것은 계절과 시간과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효과를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빛의 효과는 시시각각 변하므로 그것을 즉각적·즉흥적으로 포착해야 했다. 인상주의자들은 사물의 고유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색은 곧 빛이기에 그때그때 사물의 색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상주의 회화에서는 하나의 대상이 많은 시뮬라크르들로 해체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에 반해 세잔은 자연에서 ‘뭔가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포착하려 했다. 그 ‘본질’은 물론 수많은 습작을 통해 자연에서 논리적으로 전개되어 나온다.
인상주의가 모던 라이프의 ‘스냅사진’을 지향했다면, 세잔은 순간적 효과를 넘어 사물의 감추어진 본질을 포착하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모델들을 같은 자리에 수없이 앉히곤 했다. 그의 이 집요한 노력의 가장 큰 희생사(?)는 부인인 마리 오르탕스 피케였다.

세잔은 부인을 모델로 모두 26점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그때마다 피케는 같은 의자에 수십번 앉아야 했다. 한 번 앉으면 몇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세잔의 말대로 조금만 자세를 바꿔도 자연은 전혀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화상 볼라르(그림9)가 그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가 몸을 움직였을 때, 세잔은 그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빌어먹을! 당신이 포즈를 망쳤어요. 제발 사과처럼 앉아 있으라고 또 얘기해야겠어요? 사과가 어디 움직이던가요?"

그림9.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폴 세잔, 1899년
그림9.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폴 세잔, 1899년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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