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누보와 아르데코 III

아르누보 양식의 성립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소로는 자포니슴을 꼽을 수 있다.
아르누보를 확산시키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지크프리트 빙은 1881년 일본 예술을 소개하는 잡지를 발간한 바 있다.
아르누보는 비록 ‘모던’을 표방했지만 우리 눈에 그리 현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자연의 모방’이라는 고전미술의 이념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아르누보는 자연의 형태에서 조형의 영감을 얻었다.
즉, 아름다움의 모델을 여전히 유기체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현대적 양식, 즉 추상적이고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되는 무기물의 미학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누보는 전통적 공예에서 현대적 산업디자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파리의 지하철 입구를 장식한 아르누보 게이트를 보라.(그림 1)
강철이라는 산업적 재료를 자연에서 취한 식물 문양으로 처리하는 저 절충적 경향에서 아르누보의 과도기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림 1), 파리의 지하철 입구, 엑토르 기마르, 1899~1904년
(그림 1), 파리의 지하철 입구, 엑토르 기마르, 1899~1904년

# 아르데코

1890년경에 시작된 아르누보는 1910년경이면 생명력을 다하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아르데코(Art Deco)라는 새로운 흐름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아르데코’는 장식 예술을 뜻하는 ‘아르 데코라티프(Art Decoratif)’의 약자로 1925년 파리에서 열린 ‘장식 예술 및 현대 산업 국제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명칭은 1925년에 생겼지만 그 경향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시작됐다. 아르누보가 ‘미술과 공예 운동’의 품안에서 탄생했듯이 아르데코는 아르누보의 품 안에서 탄생했다.

사실 이 두 양식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아르데코는 오랫동안 양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르데코가 아르누보와 구별되는 독자적 양식으로 인정받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두 양식을 굳이 구별하자면 일단 아르데코는 아르누보보다 적용의 범위가 더 넓다.
건축과 장식 예술 중심으로 이뤄진 아르누보와 달리 아르데코 디자인은 기차와 여객선, 라디오나 진공청소기 같은 일상 사물까지 포괄했다.
또 ‘미술과 공예 운동’ 등 몇 가지 제한된 원천에서 조형의 영감을 받은 아르누보와 달리 아르데코는 현존하는 거의 모든 양식을 사용했다.
아르데코는 입체주의나 야수주의와 같은 당대의 언어는 물론이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서구 이외의 거의 모든 지역의 예술 언어들을 혼용했다.
이 절충적 성격 때문에 ‘아르데코’의 여러 흐름 사이에 공통된 특징을 찾기가 불가능하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저 ‘현대적으로 되려는 욕망’뿐이었다.

아르데코는 전후 복구가 이뤄진 후 잠시 찾아온 1920년 대 호황기의 산물로 그 안에는 기술적 진보가 가져올 반영에 대한 낙관적 신념이 반영돼 있었다.
아르데코의 작가들은 은이나 청동, 상아나 가죽, 유리나 수정, 흑단(黑檀) 등 사치스러운 재료를 당대 최고의 솜씨를 가진 기능장들의 손에 맡겨 자신들이 ‘모던’하다고 생각하는 형태로 빚어냈다.
그렇게 그 하나하나가 유일물이라 가격이 매우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 제품들은 미적 가치를 가진 ‘작품’이자 실용적 기능을 가진 ‘사물’이라는 이중의 규정을 갖고 있었지만 서민의 삶과는 사실 아무 관계도 없었다. ‘예술과 일상의 결합’이라는 모더니즘의 이상이 그 시절에는 이런 식으로 실현됐던 것이다.

아르데코 역시 아르누보처럼 유기적인 식물 문양을 즐겨 사용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파리 지하철 입구의 아르누보와 뉴욕 체니 실크 빌딩의 아르데코(그림 2)를 비교해보면 전자가 아직 유기적 형태를 유지하는 반면 후자는 상당히 추상화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2) 페니 실크 빌딩, 뉴욕, 1925년
(그림 2) 페니 실크 빌딩, 뉴욕, 1925년

마찬가지로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포스터(그림 3)와 조르주 바르비에의 아르데코 일러스트레이션(그림 4)을 비교해보라.

(그림 3), 샹프누아 인쇄소 포스터, 알폰스 무하, 1896년
(그림 3), 샹프누아 인쇄소 포스터, 알폰스 무하, 1896년
(그림 4), 여인과 표범, 조르주 바르비에, 1914년
(그림 4), 여인과 표범, 조르주 바르비에, 1914년

전자가 볼륨이 있는 자연주의적 재현의 느낌을 주는 반면 후자는 고도로 양식화돼 거의 평면적인 문양의 느낌을 준다. 실제로 아르데코는 데스테일이나 바우하우스에서 즐겨 사용하던 추상적·기하학적 형태를 차용하기도 했다. 

1920~1930년대에 아르데코는 전 세계로 확산된다.
크라이슬러 빌딩(그림 5) 등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이 대거 세워 지는 것도 이즈음이다.

(그림 5), 크라이슬러 빌딩, 윌리엄 밴 앨런, 1930년
(그림 5), 크라이슬러 빌딩, 윌리엄 밴 앨런, 1930년

하지만 아르데코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 시기에 이미 요란한 디자인에 대한 취향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디자이너들이 제품의 장식성보다 기능성을 더 강조하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의미의 모더니즘이 시작된 것이다.
모더니즘의 정수는 역시 기능주의 미학에 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즉 생산물의 형태는 기능에서 저절로 나오며 그렇게 얻어진 형태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if Loose, 1870~1933)는 심지어 “장식은 범죄”라고 까지 말한다. 그가 설계한 뮐러 하우스(그림 6)는 이 모더니즘 미학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그림 6), 뮐러 하우스, 아돌프 로스, 1930년
(그림 6), 뮐러 하우스, 아돌프 로스, 1930년

다른 한편 디자이너들은 강철이나 크롬과 같은 현대적 재료를 사용하며 더 빠르고 값이 싼 대량생산의 조건에 디자인을 맞추기 시작한다.
모든 재료는 저마다 자기에게 맞는 고유의 미학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상아나 은을 재료로 한 디자인과 크롬과 강철을 재료로 한 디자인의 조형 원리가 같을 수가 없다.
거기서 ‘미술과 공예 운동’ 이래로 디자인 운동을 지배해온 ‘자연미’의 이념이 붕괴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말한 ‘기계 미학’이 새로운 조형의 원리로 등장하게 된다.
아르데코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20~1930년대는 이미 바우하우스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바우하우스와 함께 ‘공예 운동’은 현대적 의미의 ‘산업디자인’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저작권자 © 덴탈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