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 세잔 I -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세잔이 없었다면 아마도 현대예술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상주의에서 출발했지만 세잔은 애초에 인상주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사물이 아니라 망막에 비친 그것의 인상을 그리려했다. 그 결과 인상주의 화면에서 사물은 그 견고함을 잃고 물그림자 같은 존재가 된다. 세잔은 인상주의의 색체 효과는 그대로 보존하되 사물에 그것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견고함을 되돌려주려 했다. 한마디로 인상주의와 고전주의를 종합하려 한 것인데, 이를 그는 “자연 위에서 푸생을 고쳐 그린다.”고 표현했다.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서구 미술이 19세기 인상주의에서 20세기 모더니즘으로 넘어다는 데에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다. 칸딘스키는 “마티스-색체, 피카소-형태”라며 이 두 인물이 “위대한 목표를 지향”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에서는 미술을 ‘자연의 모방’, 즉 가시적 현실의 재현으로 이해해왔다. 회화에서 드로잉은 대상의 윤곽을, 채색은 대상의 색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무로부터 마티스는 색채를, 피카소는 형태를 해방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미술의 이 두 위대한 이정표가 모두 세잔을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 불렀다는 점이다. 세잔이 없었다면 현대미술은 아예 탄생하지 못했거나, 최소한 그 출발이 훨씬 더 늦춰졌을 것이다.


#인상주의 시기
세잔의 이력은 그 자체가 프랑스 미술사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로 이어지는 19세기 프랑스의 미술사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초기에 그는 들라크루아와 쿠르베의 영향 아래 주로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에벤망>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버지>(그림1) 그의 화풍이 변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1872년에 시작된 인상주의자 피사로와의 교분이었다. 피사로는 그에게 “삼원색이나 거기에서 조금 벗어난 색들만 사용해라.”라고 충고하며, 나아가 윤곽선의 사용도 포기하라고 가르쳤다. 대상의 윤곽은 색가(色價)를 단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세잔은 피사로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그로써 당대의 예술 언어에 접근했다고 느끼게 된다.

그림1, 에벤망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버지, 폴 세잔, 1866년
그림1, 에벤망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버지, 폴 세잔, 1866년

피사로를 만난 후 세잔은 과거에 비해 화면을 훨씬 밝게 표현한다. 1871~1872년경에 그린 에스타크 풍경<눈 녹는 에스타크>(그림2)과 1874년에 그린 오베르 풍경<오베르 풍경>(그림3)은 이 짧은 시기에 그의 화풍이 얼마나 급격하게 변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림2, 눈 녹는 에스타크, 폴 세잔, 1871~1872년경
그림2, 눈 녹는 에스타크, 폴 세잔, 1871~1872년경
그림3, 오베르 풍경, 폴 세잔, 1874년
그림3, 오베르 풍경, 폴 세잔, 1874년

1874년 오베르 풍경에서는 에스타크 풍경을 지배하던 검은색이 완전하게 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인상주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세잔이 최초의 인상주의전에 참가한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친구인 에밀 졸라는 세잔을 천재로 여겼지만, 세잔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차라리 조소에 가까웠다. 그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피사로와 모네, 르누아르, 그리고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뿐이었다. 심지어 마네는 인상주의전에 세잔을 포함시키는 데에 반대하기까지 했다.
이 전시회에 세잔은 <현대적인 올랭피아>(그림4)를 출품했다. 이 그림은 물론 당대의 아이콘이던 마네의 <올랭피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세잔은 올랭피아를 인상주의적으로 고쳐 그렸다. 하지만 바뀐 것은 화풍만이 아니다. 이 작품을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조그만 소동이 일어났다.

그림4, 현대적인 올랭피아, 폴 세잔, 1873~1874년
그림4, 현대적인 올랭피아, 폴 세잔, 1873~1874년

세잔이 원작에는 없는 청혼자, 즉 저 창부의 고객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이는 원작보다도 더 도발적인 느낌을 줬다. 마네의 올랭피아가 여전히 고대의 여신을 연상시켰다면, 세잔의 올랭피아는 그냥 손님을 받는 창녀로 묘사됐다.
게다가 사내의 얼굴이 공교롭게도 마네를 닯았다. 마네는 세잔을 ‘(물감 개는) 흙손으로 그리는 화가’라고 혹평했다고 한다.


#위대한 종합
인상주의 기법은 받아들였지만 세잔은 결코 인상주의자로 머물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애초에 다른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 회화에 반기를 든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세잔은 고전주의를 혁신하려 했다. 사실 인상주의의 화면에서 대상은 사라져버린다. 거기에 묘사된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망막에 맺힌 영상이기 때문이다. 세잔은 이를 인상주의 회화의 가장 큰 문제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인상주의의 외광 효과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대상 자체의 느낌을 살리는 길을 모색했다. 결국 인상주의의 색채 공간과 색채 조율의 원리에 기초해 고전주의 화법을 시대에 맞게 혁신하려 한 것이다. 언젠가 그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요하임 가스케에게 이렇게 말했다.

“푸생을 전적으로 자연 위에서 고쳐 그린다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고전입니다.”

세잔이 그리려 한 것은 ‘광학적’ 현상으로서 빛이 아니라 ‘촉각적’ 대상으로서 사물이었다. 실체 없이 물그림자처럼 보이는 인상주의의 화면은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체험 속에서 사물은 뭔가 견고하고 단단한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물성’의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세잔은 피사로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드로잉이 회화의 기초라고 믿었고, 그것을 인상주의 외광 효과와 결합시키려 했다. 이것이 ‘푸생을 자연 위에서 고쳐 그린다.’는 말의 의미다. 세잔은 루브르에 소장된 그리스의 조각과 바로크 회화를 전범으로 여겼다. 전자에서는 형(形)의 견고함을, 후자에서는 색(色)의 화려함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회화적 기획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인상주의로부터 박물관에 있는 미술처럼 뭔가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여기서 세잔의 인상주의는 후기 인상주의로 이행한다. 하지만 세잔이 박물관의 작품들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그에게 스승은 여전히 자연이었다. 그는 푸생을 그리되 ‘자연 위에서’ 고쳐 그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상징주의자 귀스타브 모로를 ‘허접한 것만 그리는 탁원한 유미주의자’라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그의 꿈이 자연의 영감이 아니라 그가 박물관에서 본 것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훌륭한 사람을 내 날개 아래로 데려와 그에게 자연과의 접촉을 통해 예술을 발전시키라는 원칙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게 정상이고, 그게 편안하며, 그게 유일하게 정당한 예술의 원리니까요.”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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