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와 노르웨이의 상징주의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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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은 구스타프 클림프(1862~1918)다. 클림트는 당시의 주류에 맞서 싸운 빈 분리주의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관학미술에 상징주의와 아르누보에 맞섰기에 이 곳의 상징주의 운동을 분리파 상징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리파 상징주의는 아르누보의 영향아래 화려하며 장식적인 특성을 보여 준다. 클림트의 금빛으로 빛나는 화면은 일본 목판화와 무엇보다 라벤나의 비잔틴 모자이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클림트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여성의 성적욕망으로 거기서 그것은 생산적이면서도 파괴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 흐르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충동은 물론 당시의 빈에서 유행하던 프로이드 이론의 영향이다.

(그림) 유디트. 구스타프 클림트. 1901년
(그림) 유디트. 구스타프 클림트. 1901년

#벨기에와 노르웨이의 상징주의

벨기에 출신의 펠리시앵 롭스(1833-1898)는 파리에서 화가 ·삽화가 ·판화가로 활동하며 먼저 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베를렌 등 유명한 시인들의 책에 붙인 삽화로 이름을 날렸다. 롭스의 작품세계는 섹스와 죽음과 사탄의 도발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데, '데카당스'의 화가답게 그 대부분은 포르노그래피 못지 않게 노골적이다. 상징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상징은 대개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창부정치가>(그림1)에 등장하는 돼지는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이들은 줄에 묶인 저 돼지를 저 여인의 사치와 타욕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그 돼지소에서 육욕으로 인해 여자에게 끌려 다니는 동물같은 남자를 본다.

(그림1) 창부정치가. 펠리시앵 롭스. 1896년
(그림1) 창부정치가. 펠리시앵 롭스. 1896년

제임스 엔소르(1860~1949)는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그림2)와 함께 일거에 '유럽상징주의 세대의 주도적 인물이자 20세기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떠오른다.

저 군중속에 엔소르는 자기가족, 벨기에의 역사적 인물들, 당시 사회의 유력자들을 배치했다. 그로써 이 작품은 예수의 입성을 그린 종교화이자 브뤼셀의 카니발을 담은 풍속화가 된다. 나아가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 '사회적인 것 만세'는 이 그림을 정치적 풍자화로 만들어준다. 상징주의 회화에서 뚜렷한 메시지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 역시 끝내 '정치적 메세지가 없는 정치적 회화'로 남는다.

(그림2)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 제임스 엔소르. 1888년
(그림2)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 제임스 엔소르. 1888년

유럽 상징주의 운동에서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바로 에드바르 뭉크(1863~1944)다. "나는 보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려 한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뭉크는 자신이 과거에 체험한 것을 기억에 의존하여 표현하려 했다. 회화의 목적은 가시적 현실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나 느낌의 형태로 관객의 머릿속에 풍부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절규>(그림3)를 탄생시킨 체험을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해질녁 친구들과 길을 걷는데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을 느껴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몸을 기댔다. 불과 피가 마치 혀처럼 검푸른 피로위에 펼쳐졌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뒤쳐진 채 공포로 몸을 떨었다. 그때 자연의 엄청나고 무한한 비명을 들었다."

(그림3) 절규. 에드바르 뭉크. 1893년
(그림3) 절규. 에드바르 뭉크. 1893년

뭉크의 상징주의의 바탕에는 독특한 세계관이 깔려있다. 물질은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형태만 바뀌고(metabolism), 그 물질은 정신과 나눌수 없는 하나(monism)이며, 그것으로 이루어진 세계전체가 독신(patheism)이라는 것이다. 뭉크가 자연이 내지르는 '엄청나고 무한한 비명'을 들을수 있었던 것은 이 믿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상징주의 회화에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별 의미는 없겠지만 현대예술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이 작품은 종종 '현대세계의 여러 압박이 유발하는 심리적 공포의 상징'으로 해석되곤 한다.

 

#상징주의와 현대미술

상징주의는 사실주의·인상주의· 과학중의에 대한 반발에서 탄생한 운동으로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세속화로 뿌리를 잃은 사람들이 느끼는 극심한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한다. 대도시의 환경에서 적응할 수 없는 이들이 냉혹한 현실에서 환상의 세계로 정신적 피정을 떠난 것이다. 이 도피적·퇴행적 성격으로 인해 상징주의는 그동안 그 중요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진보의 '시대'에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그저 미학적 반동으로 여져졌을 뿐이다. 상징주의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방해한 반동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상징주의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방해한 또 다른 요인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미학이었다. 형식주의 시대에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상징주의 미술은 그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언어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징주의는 세계적 규모의 운동이었고, 그것이 없었다면 현대미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슈튜크와 클림트의 상징주의는 아르누보와 동시에 진행됐다. 고갱과 나비파의 상징주의는 프랑스에서 야수주의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야수주의 창시자 마티스는 모로에게 그림을 배웠고, 창작의 한 국면에서 상징주의 단계를 거쳤다.

엔소르나 뭉크의 상징주의는 독일에서 탄생한 표현주의의 전조였다. 나아가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는 경향은 이탈리아에서 데 기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를 낳았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성적 충동이 흐르는 롭스와 슈튜크, 클림트의 화면에서 자신들의 선구를 보았다. 심지어 다다

이스트 뒤샹도 한동안 르동의 영향아래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상징주의가 현대미술에 가장 중요한 원리를 제공했다는 점이리라. 상징주의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표현함으로써 미술을 지각적 차원에서 심리적 정신적인 차원으로 옮겨놓았다. 이는 공교롭게도 '가시적인 것의 재현이 아니라 비 가시적인 것의 가시화(파울클레)'라는 추상미술의 원리와 일치한다.

실제로 칸딘스키 ·말레비치·몬드리안·쿠프카 등 추상미술의 선구자들은 상징주의로부터 창작을 시작했다. 따라서 형식주의 미학은 이들의 추상미술을 온전히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그 바탕에 신지학(神智學)과 같은 신비중의 사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추상은 우주의 상징이다.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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