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상징주의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상징주의 운동의 선구자는 귀스타브 모로였다.

진보의 시대에 그는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영행을 통해 만테냐 ·보티첼리·다빈치등 과거 르네상스 거장들의 화풍을 배우는 데에 전념했다. 그는 실크나 도자기, 카펫 등 동양의 진귀한 물건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에 강한 장식성이라는 흔적을 넘겼다. 모로는 그림의 제재를 대부분 고대의 신화에서 취했다. 주로 신화나 성서의 제재를 다루었지만 그가 전통적인 역사화가였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것은 사건이나 인물의 생생한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표현되는 몽환적 분위기와 그것으로 환기되는 강렬한 정서적 효과였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 역사화에는 없었던 명백한 상징주의적 특성이다.

대표적으로 꼽히는 <환영 :살로메의 춤> (그림1)과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그림2) <오르페우스>(그림3)을 보자. 첫 눈에도 이들 제재가 전통적인 역사화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 것을 느낄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 무희의 관능적인 춤 때문에 잘려나간 요한의 목, 내기에 져서 나일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스핑크스, 무녀들의 손에 찢겨져 죽은 오르페우스, 그림 속 여성들은 남자를 유혹하여 파멸로 몰아넣는 팜므마탈로 나타난다. 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충동은 전통적인 역사화에서는 찾아볼수 없었던 것들이다. 전통적 모티브들이 여기서는 과거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폭력과 죽음과 성적 욕망이라는 어두운 힘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림1) 환영 : 살로메의 춤. 귀스타브 모로. 1876년
(그림1) 환영 : 살로메의 춤. 귀스타브 모로. 1876년

 

(그림2)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귀스타브 모로. 1864년
(그림2)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귀스타브 모로. 1864년
(그림3) 오르페우스. 귀스타브 모로. 1865년
(그림3) 오르페우스. 귀스타브 모로. 1865년

사실 상징주의는 양식이 아니라 태도의 이름이라 그 외연을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후기 인상중의 작가 대부분은 상징주의 이전에 이미 상징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호는 작품에 다양한 상징을 사용했고 고갱역시 삶의 한 시점에서 상징주의 단계를 거쳤다. 추상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나비파 역시 자연의 묘사와 개인적 은유내지 상징의 종합을 꾀했기에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 운동으로 볼수 있다. 그룹의 이름인 ‘나비(Navi)’는 히브리어로 ‘선지자’라는 뜻으로 이들의 목표가 자연의 재현을 넘어 어떤 지고한 정신의 표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모로 밑에서 배운 마티스나 루오 역시 야수주의 이전에 먼저 상징주의 단계를 거쳤다.

프랑스에서 모로와 더불어 확연한 ‘상징주의자’로 꼽히는 또 다른 인물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이다. 신화와 성서의 전통적제재를 취한 모로의 경우와 달리 르동의 환상은 대부분 작가 자신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악몽과 꿈의 종합’이라고 불렀다. 언뜻 보면 현실을 떠나 꿈과 악몽의 세계로 도피한 것 같지만 사실 르동의 환상은 가시적 현실에 대한 철처한 연구위에서 있다. <나에게>(1922)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모든 독창성은 되도록 가시적인 것의 논리를 비가시적인 것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개연성의 법칙에 따라 비현실적 존재에 인간의 생명을 부여하는 데에 있다."

한마디로 르동의 상징주의는 현실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환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그림4), (그림5)

(그림4) 칼라반 작은괴물. 오딜롱 르동. 1881년
(그림4) 칼라반 작은괴물. 오딜롱 르동. 1881년
(그림5) 키클롭스. 오딜롱 르동. 1914년
(그림5) 키클롭스. 오딜롱 르동. 1914년

#독일어권의 상징주의

아르놀트 뵈클린(1827~1901)은 흔히 독일의 상징주의 작가로 거론되나 정확히 말하면 스위스 작가다. 이탈리아 미술에 매료된 그는 아예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그 곳거장들의 스타일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가운데 명확한 윤관과 강렬한 색감으로 특징 지어지는 고유의스타일을 완성하게 된다. 뵈클린의 대표작인 <죽은자의 섬>(그림6)은 관을 싣고 섬으로 향하는 작은 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남부에는 실제로 묘지로 사용되는 무인도들이 있다고 한다. 섬의 중앙에 수직으로 자란 실측백나무는 ‘죽음’의 상징다. 원래 이 그림은 침실에 걸어놓기 위한 것이었는데, 주문자는 화가에게 잠을 잘 때 되도록 많은 꿈을 꾸게 해주는 그림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림6) 죽은자들의 섬. 아르놀트 뵈클린. 1883년
(그림6) 죽은자들의 섬. 아르놀트 뵈클린. 1883년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28) 역시 뵈클린터럼 스위스 출신의 상징주의 작가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밤>(그림7)은 여러 유파의 영향아래 있던 호들러가 결정적으로 상징주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한 사내가 밤에 잠을 자다가 정체를 알수 없는 존재의 방문에 깨어 소스라치게 놀란다. 우리는 망토를 뒤지어 쓴 존재가 ‘죽음’이라는 것을 안다. 이 그림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나 평소에 잊고 지내는 진실을 일깨워준다.

(그림7) 밤. 페르디난트 호들러. 1889~1890년
(그림7) 밤. 페르디난트 호들러. 1889~1890년

‘밤에 잠자리에 드는 모은 이가 다음 날 아침 다시 깨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림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내는 물론 호들러 자신이다.

인물들의 리드미컬한 대칭적·반복적 배열에 이미 ‘평행주의’라는 호들러식 상징주의 특성이 엿보인다.(그림5)

 

독일의 화가 프란트 폰 슈투크(1863~1928)는 뵈클린의 영향아래 주로 신화나 성서에서 모티브를 가져다 썼다. 기법은 신고전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전통적이나 작품에 흐르는 정신만은 뚜렷이 상징주의적이다.

<원조>(그림8)는 창세기속 이브의 모습을 보여주나 몸에 뱀을 두른 여인의 퇴폐적 관능성은 가독교 도상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그림8) 원조. 폰 슈투크. 1893년
(그림8) 원조. 폰 슈투크. 1893년

강렬한 성적 욕망과 뒤따라올 남성의 필연적 죽음.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여기서 완전히 다른 뉘앙스로 변형된다. 그림 속 여인은 성서적 이브보다는 차라리 세속의 이브, 즉 팜므마탈에 가깝다.

슈투크도 호들러처럼 아르누보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작품의 일부로 간주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액자에서 그 영향을 엿 볼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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