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실현하라 -세잔 III-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세잔의 위대함은 미술을 ‘시각적인 것’에서 ‘촉각적인 것’ 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데에 있다.
선 원근법에 기초한 르네상스 회화는 물론이고, 빛의 효과에 기초한 인상주의 회화는 철저히 광학적 성격의 예술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지각이 시각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정신의 눈이 아니라 몸 전체로 주위 환경을 지각한다.
이렇게 신체로 체험하는 원근법에서는 하나의 장면 안에 다수의 시점이 애매모호하게 결합된 채로 공존한다.
이 촉각적 공간의 도입을 통해 세잔은 500년 이상 지속된 고전미술의 가장 중요한 규약, 즉 원근법을 파괴한다.
현대미술의 선구가 된 입체주의는 세잔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잔은 한 장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모델을 같은 자리에 수없이 앉혔다.
아무리 고쳐 그려도 자연의 본질을 제대로 포착했는지 스스로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이른바 ‘세잔의 회의’다.
여기서 그의 작업 방식이 순간적 인상을 즉흥적으로 표현하던 인상주의자들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 엿볼 수 있다.
1906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잔은 “눈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지만 아직도 느낀 것들을 실현하는 데에 항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실토한다.

“감각들 앞에서 전개되는 저 강렬함에 도달할 수 없어.” <세잔 부인의 초상>(그림1)

그림1. 세잔 부인의 초상, 폴 세잔, 1885~1887년
그림1. 세잔 부인의 초상, 폴 세잔, 1885~1887년

감각에 나타나는 자연의 ‘강렬함’을 상대하는 것이 그에게는 큰 고역이었다.
화상 볼라르와 나눈 대화에서 그는 그 고통을 이렇게 토로한다.

“회화는 확실히 내게 세계 속의 나머지 모든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나는 자연의 존재 속에 있을 때 정신이 더 맑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내 감각의 실현은 내 안에서 항상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내 감각들 위에서 고동치는 저 강렬함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저는 자연을 생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저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을 아직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잔 부인의 초상의 화면>(그림2)

그림2. 세잔 부인의 초상의 화면
그림2. 세잔 부인의 초상의 화면

 

# 푸생을 자연 위에서
세잔이 사용되는 물감의 수를 늘린 것도 저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을 통제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인상주의는 스펙트럼의 일곱 색을 주로 사용했고 신인상주의는 그것을 다시 삼원색으로 환원시켰다.

반면에 세잔의 화면에는 여섯 개의 빨강, 다섯 개의 노랑, 세 개의 파랑, 세 개의 녹색, 그리고 한 개의 검정 등 모두 열여덟 가지 색이 존재한다.
특히 인상주의나 신인상주의가 배제한 검정을 다시 화면에 도입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명암으로 대상에 촉각적 실체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색체 효과에 주력하는 것은 사실 세잔과 인상주의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으나, 색채를 처리하는 양자의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를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이렇게 설명한다.

“경우에 따라 윤곽을 지우고 색채를 윤곽 위에서 올려놓는 것이 세잔과 인상주의자들에게는 각각 다른 의미를 갖는 듯하다. (세잔의 경우) 대상은 더 이상 반사광에 뒤덮여 대기와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안에서 미묘하게 조명이 되어, 그로부터 빛이 발산되는 듯이 보인다. 그 결과는 견고함과 물질적 실체성의 느낌이다.” <병과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그림3)

그림3. 병과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폴 세잔, 1890~1994년
그림3. 병과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폴 세잔, 1890~1994년

이것이 “푸생을 전적으로 자연 위에서 고쳐 그린다.”거나 “인상주의로부터 뭔가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말의 뜻이다.
고전주의와 인상주의라는 두 대립적 경향을 오로지 감각에 의존하여 하나로 종합하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의 정물을 위해 100번을 세팅하고, 한 명의 모델을 같은 자리에 150번이나 앉혀야 했던 것이다.


# 체험된 원근법
세잔이 그토록 힘들게 그림을 그린 이유는 뭘까?
그는 “자연으로부터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실현하는 것”<바구니가 있는 정물>(그림4)이라 믿었다.

그림4. 바구니가 있는 정물, 폴 세잔, 1888~1890년
그림4. 바구니가 있는 정물, 폴 세잔, 1888~1890년

다시 말해 그는 지각을 재현한 다른 화가들과 달리 감각 자체를 실현하려 했다.
지각과 감각은 다르다. 지각이 ‘정신’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회화가 ‘정신적’ 현상으로서 지각의 대상을 재현했다면, 세잔의 회화는 ‘육체적’ 현상으로서 감각의 사건을 실현하려 했다.
정신의 눈으로 보는 세계와 신체로 체험하는 세계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세잔이 그리려 한 것은 바로 후자였다.
‘제재를 넘어서 감각을 실현하라.’ 는 세잔의 모토는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사실 원근법적으로 재현한 세계는 자연적 감각으로 본 세계와는 거리가 있다.
원근법적 재현은 ‘한 눈으로 본 것을 고정된 시점에서 평면 위에 투사한다.’ 는 규약 위에 서 있다.
하지만 ‘본다’는 것이 실제로 그렇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물을 두 눈으로, 안구를 움직여 시점을 바꿔가며 보며, 우리의 망막도 평면이 아니라 구면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화가들은 원근법적 재현만이 현실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묘사라 굳게 믿어왔다.
세잔은 서구 미술사에서 최초로 이 500년 묵은 지각의 관습을 의심했다.
오직 그만이 원근법적 재현이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세계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체험된 원근법’이라 불렀다.
객관적 시간과 체험된 시간이 다르듯이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세계는 선 원근법으로 묘사된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사진이나 기하학적 원근법에는 시점이 ‘하나’뿐이나, 우리가 뭔가를 볼 때는 안구를 움직여 초점을 바꿔가며 대상들을 차례로 스캔하듯이 보기에 하나의 장면 안에 다수의 시점이 존재하게 된다.
그 시점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한 전체상 속에서는 각각의 시점을 담은 조각들이 아귀가 맞지 않게 된다.

실제로 <세잔 부인의 초상>에서 보듯이 세잔의 화면에서는 상이한 시점의 지각판(知覺板)들이 마치 충돌하는 지각판(地殼板)처럼 애매모호하게 결합돼 있다.(그림1, 2)
이렇게 아귀가 틀어지는 것은 물론 정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병과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그림3)에서 탁자보 양 옆의 탁자의 선을 연장시키면 직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탁자 뒤쪽의 선들도 마찬가지여서 바구니로 가린 양쪽의 선들을 연장시키면 서로 만나지 않는다.
이 사실을 가리려고 세잔은 탁자의 가운데를 탁자보로 가리곤 했다.

<바구니가 있는 정물>(그림4)에서도 탁자보 양 옆의 선들은 서로 직선으로 만나지 않는다.
또 탁자 뒤쪽 단지의 입과 앞쪽 주전자의 뚜껑을 비교해보라.
단지 입의 타원형보다 앞쪽 뚜껑의 타원형의 폭이 더 좁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단지와 찻주전자가 각각 다른 시점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하학적 원근법에 익숙한 눈에는 세잔의 화면이 어지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하는 체험에 가까운 것은 르네상스 이래의 기하학적 원근법이 아니라 세잔이 발견한 저 체험된 원근법이다.
왜냐하면 뭔가를 ‘본다’는 것은 그저 반사된 빛이 동공으로 들어와 망막에 비치는 것 이상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을 움직이고 안구를 굴려 초점을 바꿔가며 시시각각 부분적 인상들을 받아들인다.

이 파편적 인상들은 ‘뇌의 해석’을 통해 하나의 전체상으로 통합된다.
한마디로 과거의 화가들이 해부학과 카메라오브스쿠라를 이용해 ‘광학적’ 그림을 그렸다면, 세잔은 오로지 자신의 감각에만 의존해 ‘뇌과학적’으로 그림을 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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