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 (31)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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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2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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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실현하라 -세잔 IV-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 감각의 실현

500년의 전통을 가진 회화의 관습을 깨뜨리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 전제 없이 오로지 감각에만 의존해 그림을 그리려 해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500년의 세월을 거치며 거의 자연 혹은 본능이 돼버린 규약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잔도 이를 알고 있었다.

 

“슬프게도 나는 더 이상 천진하지 않다. 우리는 문명화된 존재들이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는 우리 뼛속에 고전적 문명의 걱정과 근심을 가지고 있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나 자신을 명확히 표현하고 싶다. 천진함을 가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관학적 유형의 것보다 더 혐오스러운 종류의 야만이 있다. 오늘날 더 이상 천진할 수 없다. 누구도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온갖 편의로 무장한 세계 속에 들어왔다. 편의는 예술의 죽음이며, 우리는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문명 세계에 사는 이상 우리는 쌓아올린 지각의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관습적인 지각의 프레임은 우리로 하여금 그림을 편리하게 그릴 수 있게 해준다. 문제는 그 편리함이 진정한 예술에 방해가 된다는 데 있다. 편의는 ‘예술의 죽음’이다. 그리하여 세잔은 마치 참된 출발을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방법적으로 회의한 데카르트처럼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머리에서 지우고 오직 감각에 나타나는 대로 그리려 했다. 현상학자들이라면 아마도 이를 ‘판단중지(epoché)’라 불렀을 것이다. 세잔은 자신을 ‘두뇌 없는 동물’이라 불렀다. 진정한 회화는 문명에서 배운 모든 것을 머리에서 비우는 데서 출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잔이 보기에 “예술가는 감각의 수용자이자 뇌이며 기록 장치다. 그가 중간에 끼어들어 번역 과정에 의도적으로 개입하려고 하면 작품은 망가지게 된다. 그의 의지는 일체 침묵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죽이고 일종의 기록자로서 감각에 나타난 현상을 충실히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잔이 제시하는 것은 현대적 작가의 상이다. 미학자 아도르노는 현대의 작가를 일정의 ‘영매(medium)'로 규정한 바 있다. 자신의 의도를 비우고 오로지 감각 위에서 자연을 기록한다고 하여 예술이 자연보다 열등한 것은 아니다. 세잔에 따르면.

 

“예술은 자연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조화를 갖고 있다. 예술가가 항상 자연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바보다. 예술가는 자연에 필적한다. 물론 그가 의도적으로 개입하려 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예술가의 모든 의도는 침묵이어야 한다. 제 안의 모든 편견의 목소리들을 침묵시켜야 한다. 잊어야 한다. 그러면 풍경 전체가 그의 존재의 예민한 판 위에 새겨질 것이다.”

 

모든 편견의 목소리들을 침묵시킨 채 오직 감각에 나타나는 현상을 충실히 기록할 때 풍경 전체가 전체를 존재의 예민한 판 위에 새기게 된다. 이를 세잔은 ‘감각의 실현’이라 불렀다. 이렇게 감각이 실현될 때 자연과 예술은 나눌 수 없는 하나가 된다. 바로 그것이 세잔이 그 많은 회의를 겪으며 도달하려고 한 목표였다.

 

# 마지막 고전주의자, 최초의 현대주의자

세잔의 작업은 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이행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과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 고전적 원근법과 다른 체험된 원근법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효과를, 피카소는 그에게서 형태의 기하학적 단순화와 고전적 원근법의 파괴를 배웠다. 현대 미술의 두 위대한 이정표 모두 세잔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고전미술을 파괴하는 것은 세잔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자연 위에서 푸생을 그리는 것, 즉 인상주의의 색채 효과를 유지한 채 형태의 고전주의적 구축으로 돌아가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잔은 보수적이었다.

화면에 다(多)시점을 도입하면서 세잔은 시점들 사이의 균열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세잔의 경우 시점들 사이에 균열이 존재하는 곳은 대부분 인물이든, 바구니든, 탁자보든, 항상 그 무언가로 가려져 있다. 전통 회화에서처럼 화면 전체가 마치 하나의 시점으로 구축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화면에 통일된 전체상을 구축하는 것은 세잔이 여전히 추구한 고전주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입체주의자들이라면 아마 시점들 사이의 균열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세잔의 예술적 기획은 여전히 전통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몇몇 작품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거의 현대미술을 연상시킨다.

그림 1 : 벌거벗은 동자상이 있는 정물, 폴 세잔, 1895년
그림 1 : 벌거벗은 동자상이 있는 정물, 폴 세잔, 1895년

이를테면 <벌거벗은 동자상이 있는 정물>(그림 1)을 보라. 묘사한 3차원 공간은 극단적으로 왜곡돼 있어 도저히 19세기에 제작된 작품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페퍼민트 병이 있는 정물>(그림 2)을 보자. 화면에서 3차원 공간의 깊이감이 사라져 평면에 가까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대상들의 형태는 거의 추상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하고, 색채 역시 재현의 의무에서 벗어나 거의 자율성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마티스와 드랭의 야수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현대미술의 이 두 이정표도 세잔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그 탄생이 뒤로 한참 늦춰졌을 것이다. 세잔은 마지막 고전주의자이자 최초의 현대주의자였다.

그림 2 : 페퍼민트 병이 있는 정물, 폴 세잔, 1893~1895년
그림 2 : 페퍼민트 병이 있는 정물, 폴 세잔, 1893~1895년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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