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산업혁명은 곧 사물을 제작하는 방식의 혁명이었다.
장인의 손으로 만든 과거의 공예품과 달리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물건들은 디자인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이 미학적 참상을 극복하기 위해 윌리엄 모리스 같은 이는 과거 장인들의 공에 정신을 부활시키려 했다.
하지만 산업 생산물에 과거 장인 생산의 디자인을 적용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산업 생산물에 당대적 디자인을 결합시키려는 미학적 시도로 시작된 것이 아르누보 운동이다.
아르누보와 아르데코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범으로 한 고전적 공예는 인공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모던의 산업 디자인으로 진화한다.

19세기 미술사를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흐름은 예술과 산업을 융합하려는 시도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19세기에는 산업혁명을 통해 사회적 생산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산업화를 통해 바뀐 것은 그저 생산 방식만이 아니었다.
산업화는 급속한 도시화를 가져왔고 이는 유럽인들의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이런 사회적·경제적 변화는 당연히 문화적 상부구조에도 영향을 끼쳤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발생한 인공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적 취향이 자연적 환경에서 살아가던 과거의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모범이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변화하는 과정이 그저 순조롭게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사물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산업혁명은 생산의 혁명이자 지각의 혁명이었다.

예를 들어 산업화 이전에는 모든 생산이 수공업으로 이뤄졌다.
수공업으로 제작된 제품은 하나하나가 장인의 손을 거쳐 완성된 ‘원작’이다.
하지만 장인의 솜씨에 기초한 전통적 수공업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속히 기계를 이용한 비인격적 대량생산으로 대체된다.
대량생산된 제품들은 당연히 기계로 찍어낸 ‘복제’일 수밖에 없다. 그로써 사물의 ‘정의’가 달라진다.

과거에 사물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물’이었다.
하지만 산업 생산물은 하나의 주형을 이용해 대량으로 찍어낸 복제로 같은 라인에서 생산된 다른 것들과 똑같은 ‘상사물(相似物)’일 뿐이다.
이는 당연히 사물이 지닌 ‘가치’의 저하로 이어졌다.
장인이 공방에서 하나하나 손수 만든 제품과 공장에서 기계로 대량으로 찍어낸 제품은 당연히 그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인이 생산한 원작은 망가져도 수리를 해가며 대를 이어 물려 써야 할 것으로 여겨지나,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물건들은 굳이 망가지지 않아도 싫증이 나면 바로 버려지게 마련이다.

공장 생산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으나, 장인의 혼이 들어간 물건들이 무정한 기계로 찍어낸 싸구려 물건들에 밀려 사라지는 상황이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산업화 초기만 해도 산업 생산물의 디자인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산업 디자인’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미술과 공예 운동
물론 세상이 미적 가치가 결여된 싸구려 공산품으로 채워지는 것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산업 생산물에 다시 미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것들을 조악한 디자인의 시작적 폭력에서 구제하려 했다.

이 운동의 구체적 계기가 된 것은 1851년 런던 수정궁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다.
훗날 이 움직임은 ‘미술과 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영국 산업의 위상을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조직된 박람회여서 그런지, 출품된 작품들은 기술적으로는 몰라도 미학적으로는 수준 이하였다.
미술사학자 니콜라스 페브스너(Nikolaus Pevsner, 1902~1983)는 출품작들을 “패턴 창조의 기본적 욕망과 표면의 통합성에 대한 무지, 그리고 디테일의 통속성‘이라 평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저 기계가 산업 생산물에서 취향을 몰아낸 것이 아니다. 1850년경이면 기계가 이미 그나마 남은 공예마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망쳐놓은 형국이 된 셈이다.”

‘미술과 공예 운동’은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낀 전시회 조직자들의 손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 운동은 종종 이들보다 건축가이자 직물 디자이너인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의 이름과 결부되곤 한다.
삽화가 월터 크레인, 화가 단테 로세티와 더불어 이 디자인 개혁 운동에 구체적 형상을 부여한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산업 생산물에 다시 미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흥미롭게도 중세의 장인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다분히 낭만적이고 복고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사실 ‘미술과 공예 운동’은 라파엘전파의 복고풍이 회화에서 디자인으로 연장된 것에 가까웠다.
실제로 모리스가 남긴 회화 작품은 이 운동의 조형이 라파엘전파에서 출발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림 1)

(그림 1) 기네비어 왕비, 윌리엄 모리스, 1858년
(그림 1) 기네비어 왕비, 윌리엄 모리스, 1858년

윌리엄 모리스의 저택 ‘레드 하우스’(그림 2)는 ‘미술과 공예 운동’의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림 2) 레드 하우스, 필립 웨브, 1860년
(그림 2) 레드 하우스, 필립 웨브, 1860년

중세를 연상시키는 건물의 외관은 건축가 필립 웨브가 설계하고 건물의 인테리어는 윌리엄 모리스가 맡았다.
모리스의 중세주의가 그저 중세의 재연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다.
모리스는 고딕건물을 피상적으로 베끼기보다 고딕의 정신을 당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림 3)

(그림 3) 뚜껑별꽃 벽지와 직물, 윌리엄 모리스, 오리지널 재연
(그림 3) 뚜껑별꽃 벽지와 직물, 윌리엄 모리스, 오리지널 재연

1861년 모리스는 중세에서 영감을 받은 수공으로 제작한 인테리어 물품을 제작해 판매하기 위해 회사를 차렸는데 이 회사의 제품이 세인의 주목을 끌며 번창하기 시작한다.
이 회사는 1875년에 ‘모리스 앤드 컴퍼니(Morris and company)’로 이름을 바꾼 후 1880~1890년대 전성기를 거쳐 그의 사후인 1940년까지 존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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