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1881~1973)

[두 형제 ] 1906, 캔버스에 유채, 142x97cm, 바젤 미술관
[두 형제 ] 1906, 캔버스에 유채, 142x97cm, 바젤 미술관

두 형제
피카소가 1906년 여름을 보낸 카탈루냐 시에라 델 카디의 작은 마을 고속에서 그 린 이 캔버스화는 피카소의 ‘장밋빛’ 시기의 종언을 고하는 작품이다. 매우 단순하고 거의 원시적인 이미지이지만 보 는 이를 묘하게 사로잡는 매혹적인 그림이다. 
나체의 사춘기 소년이 더 어린 소년(<두 형제>라는 제목 은 피카소가 붙인 것이 아 니지만, 아마도 동생일 것으로 추정되는)을 업고 아무 특징 없는 풍경을 걷고 있다. 하나의 수평선이 대지와 하늘 사이를 나누고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이 그림은 매우 특별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두 소년 사이에서, 나이든 소년의 목덜미에서 만나는 세 개의 손이 보여주는 신뢰감에서, 그리고 화가와 그 주제 사이에서)를 자아 내고 있다. 다소 작은 붓 터치로 물감을 핥아내고 윤곽은 부드럽게 실체가 된다. 
나이든 소년의 몸에 부피감과 정확한 무게감을 주는 모델링에는 대단한 절제와 빛이 미성숙한 마른 몸에 비쳤을 때 불러 올 수 있는 효과에 대한 예리한 인식 을 적 용했다. 

포즈, 비례, 형식의 단순화는 기원전 600년경의 아티카의 쿠로스를 연상시킨다.  이 그림에서 가장 섬세하고 단호한 부분은 나이든 소년의 머리인데, 소년은 그림 
바깥을 향해 애교 넘치는 눈길을 던지고 있다. 

바짝 깎은 머리, 검은 눈동자, 그리고 엘프 같은 표정에는 뭔가 낯익은 구석이 있 다. 지인들에 의하면 모델은 ‘바토 라부아르’라고 알려진 파리의 아파트 블록에 살고 있던 남창이라고 한다.

[곡예사의 가족 ], 1905, 캔버스에 유채, 212.8×229.6cm, 워싱턴 DC, 내서널 갤러리
[곡예사의 가족 ], 1905, 캔버스에 유채, 212.8×229.6cm, 워싱턴 DC, 내서널 갤러리
[말을 끄는 소년], 1905-06, 캔버스에 유채, 220.3×130.6cm, 뉴욕 현대 미술관(MoMA)
[말을 끄는 소년], 1905-06, 캔버스에 유채, 220.3×130.6cm, 뉴욕 현대 미술관(MoMA)
[대리석 청년 상의 토르소(쿠로스)] 기원전 6세기 중반, 파리, 루브르 박물관
[대리석 청년 상의 토르소(쿠로스)] 기원전 6세기 중반,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피카소의 '장밋빛' 시기 큐비즘의 길을 닦다
‘청색’에서 ‘장밋빛’으로의 변환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1903년 말 ‘청색’ 작품들의 어두운 내향성에 발이 묶여 있던 피카소는 앞으로의 작품들을 밀고 나갈보다 긍정적인 전도를 발전시키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장밋빛’ 시기와 <아비뇽의 여인들 >(1907)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피카소 예술의 주요 원동력이었다.

더욱 따뜻한 색, 더욱 밝은 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컬러 키’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전성기의 테라코타 핑크 회화가 일어나기 2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주제역시 깡마른 악사, 꼭 붙어 있는 알코올 중독자 커플, 뺨이 푹 꺼진 슬픈 눈의 어린이들로부터 공중곡예사 서커스 배우, 콩메디아 델라르테 commedia dell'arte의 가족으로 바뀌었다.

처음에 피카소는 <곡예사의 가족> 1905에서처럼 프랑스 조형 회화의 고전 전통을 실험했으나 그의 과격한 마인드를 충족 시켜주지 못했다. 피카소는 회화를 그 원시적인 뿌리로 되돌리고 싶어 했으며 그것이 바로 고술을 찾은 이유였다.

파리 예술의 세련을 벗어나 더 즉각적이고 더 살아 숨쉬는 리얼리티를 찾아내는 것, <두 형제>는 이러한 탐색의 정점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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