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회화

본지는 앞으로 안휘준 교수의 著書 『한국회화사』를 연재하려고 한다.
선사시대의 선각화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繪畫 그리고 조선왕조 초기·중기·후기·말기의 회화에 대한 안휘준 교수 특유의 문체와 시각으로 한국의 회화사를 조망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한다.(편집자주)

 

2. 백제의 회화

백제도 고구려 못지않게 회화를 크게 발전시켰고 묘제, 불상, 공예에서와 마찬가지로 회화에서도 백제 특유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양식을 형성했던 것이다.
백제의 회화는 고구려와 중국의 남조 특히 양의 회화와 교섭을 가지면서 그것을 토대로 다른 나라의 회화와 구분되는 화풍을 이뤘던 것으로 믿어진다. 
지금까지 밝혀진 백제의 고분벽화들은 백제와 고구려의 밀접하면서도 상이한 회화 관계를 잘 말해 준다.

백제와 양과의 회화 교섭은 삼국사기와 양서의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양서원 54, 열전 제 48, 제이의 백제에 관한 기록을 보면 “중대통 6년(서기 534년)과 대동 7년(서기 541년)에 누누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아울러 열반 등의 경의와 모시박사 및 공장과 화사 등을 청하므로 칙서를 내려 모두 주게 했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다시 삼국사기 권 26, 백제본기 제 4, 성왕 19년조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러나 양조의 회화가 백제의 회화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당시의 양조에서는 회화를 특히 좋아해 많은 작품을 모았던 무제의 지원 하에 산수화와 불교회화가 꽃피고 서역에서 음영법과 요철법을 배워온 장승요 같은 거장이 활약하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백제에도 이런 서역의 화법이 가미된 양의 산수화와 인물화 및 불교회화가 많이 유입돼 영
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
된다.

백제의 회화도 뒤에 살펴보듯이 고구려의 회화와 더불어 일본의 고대 회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의 회화도 고구려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국제성이 강하면서도 독자성이 뚜렷한 양식을 발전시켰다고 하겠다.
그러나 백제의 회화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시대의 변천에 따른 화풍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형편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에 그려진 사신도와 비운문 및 연화문, 부여의 규암면 절터에서 출토된 산수문전, 그리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족좌와 두침에 그려진 어룡, 신수, 연화문, 동탁은잔에 새겨진 산악도 등이 백제의 회화를 말해주는 자료의 전부이다.

백제에서도 고구려 후기 벽화고분의 영향을 받아 무덤 내부에 벽화를 제작했다. 
앞에 언급한 송산리 6호분과 능산리 벽화고분에 그려진 사신도, 둥실둥실 떠다니는듯한 비운문과 연화문 등은 그 좋은 증거이다. <그림 1>

그림 1 : 능산리 벽화고분의 비운문과 연화문, 7세기, 석벽에 채색
그림 1 : 능산리 벽화고분의 비운문과 연화문, 7세기, 석벽에 채색

그러나 이 비운문과 연화문에는 백제다운 부드러운 동감이 넘친다.
무엇보다도 백제 회화의 발달 정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역시 규암면 절터에서 출토된 산수문전이다. <그림 2>

그림 2 : 산수문전, 백제, 7세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그림 2 : 산수문전, 백제, 7세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7세기 초 경의 것으로 믿어지는 이 산수문전이 당시 백제 회화의 진수를 대표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당시 회화의 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산수문전에 보이는 산수의 모습은 좌우대칭의 구성을 이루고 있다.
근경의 도식화된 수면과 하늘의 구름을 제외한 부분은 모두 산으로 채워져 있다.
좌우에 울퉁불퉁한 바위산이 나타나 있고 중앙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세 봉우리의 산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다.
또 근경의 오른쪽 하단부에는 산사를 향해 걸어가는 승려의 모습이 보인다. 

이렇듯 이 산수문전은 좌우대칭을 이루는 안정된 구성을 보여주고 또 산들은 각기 특성을 지닌 채 공간과 거리감 그리고 산다운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물론 삼봉의 산들이 도식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매우 발달된 형태의 산수문임이 틀림없다.
이것이 전을 구워 만드는 장인의 솜씨인 것을 고려하면 회화를 전문으로 하던 당시 화공들의 작품 수준은 이보다도 훨씬 높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7세기에 있어서의 우리나라 회화는 인물화는 물론 산수화에서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산수문전에 보이는 삼산형의 산악도는 무령왕릉 출토의 동탁은잔에 새겨진 산악 문양으로 미뤄봐 백제에서 아무리 늦어도 이미 6세기 초 경 전후해서부터 널리 유행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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