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선사시대의 선각화(線刻畵)

본 지는 앞으로 안휘준 교수의 著書 『한국회화사』를 연재하려고 한다. 선사시대의 선각화 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繪畫 그리고 조선왕조 초기·중기·후기·말기의 회화에
대한 안휘준 교수 특유의 문체와 시각으로 한국의 회화사를 조망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한다.(편집자주)

 

선사시대의 미술은 대체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의 3기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라스코(Lascaux) 동굴이나 스페인의 알타미라(altamira) 동굴 등에서 보듯이 늦어도 구석기시대 후기인 기원전 15,000~10,000년경에 인적이 쉽게 미칠 수 없는 깊은 동굴의 바위 표면에 선각을 가하거나 채색을 해 사냥하는 인물과 동물의 모습 등을 묘사한 매우 높은 수준의 동굴벽화가 제작됐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구석기시대의 문화가 존재했음이 1960년대부터의 활발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구석기시대 미술문화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구체적인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분명한 자료들이 충분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특히 회화사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결정적인 자료는 전혀 발견된 바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기를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겠다.

신석기시대에는 토기와 골각기의 표면에 빗살무늬, 점열무늬, 격자무늬 등의 기하학적 문양을 새기는 일이 널리 유행됐다.
그런데 이러한 문양들은 매우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것일 뿐 어떠한 사물의 형태를 표현한 구체적인 회화적 요소로 간주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림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넓은 뜻에서 회화적인 성격을 지닌 선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암벽이나 청동기의 표면에 새겨진 각종 동물과 인물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회화 작품은 아니지만 회화성을 강하게 띠고 있기 때문에 회화의 시원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암각화로서 가장 회화성이 강한 것은 경상남도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의 반구대에 새겨진 여러 가지 동물들과 인물들의 모습이다.(그림 1) 

이 암각화는 강가의 깍아지른 듯 매끄러운 폭 8m 정도에 높이가 2m 가량 되는 절벽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에 제작 연대를 확정짓기 어려우나 양식적으로 봐 신석기시대 말기나 청동기시대의 작품일 것으로 추측된다.
절벽의 표면에 호랑이, 멧돼지, 늑대, 개, 사슴, 염소, 고래, 거북 등 각종 동물들과 사람의 모습을 쪼아 선각이나 면각으로 나타낸 것으로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이나 사상과 관계가 깊은 어떤 주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성기를 노출한 남자의 모습이나 새끼를 밴 염소, 사슴, 고래 등의 모습을 보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원시미술 특유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앞에 열거한 여러 종류의 뭍 동물들과 함께 고래와 거북이 같은 바다동물들이 많이 새겨져 있고 망을 쳐서 동물을 잡는 모습이나 잡은 동물을 가둬 두기 위한 목책들이 묘사돼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수렵과 어롱 큰 비중이 주어져 있던 당시의 생활상이 엿보인다.

그런데 종류가 다양한 동물이나 인간의 신체적 특징들이 정확하게 표현된 것을 보면 제작자의 관찰력이 예리하고 묘사력이 능숙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새겨진 동물과 겹치게 새겨진 것도 보여서 같은 바위 표면에 나타난 동물과 인물들이 모두 한꺼번에 같은 사람에 의해 제작된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다수의 동물들이 복잡하게 흩어진 것처럼 새겨진 데다가 이렇듯 제작 연대를 달리하는 것들이 겹쳐져 있어 본래의 구도상의 특징 같은 것을 분명하게 밝혀볼 수가 없다.

본래 이러한 암각화는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북유럽과 시베리아를 비롯해 많은 곳에서 발견돼 있으나 특히 시베리아의 아무르 강가의 것들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는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의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경향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밖에 반구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울주군 두동면 청전리와 경북 고령군 개진면 양전동 등에서도 뚜렷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동심원, 와문, 능형문, 방형문 등 기하학적인 문양들을 새긴 암각화들이 보고돼 있다.
반구대에 새겨진 동물이나 인물과 어느 정도 유사한 것들이 청동기시대의 몇 몇 작품들에도 간혹 엿보인다.
그 좋은 예로 일본 고꾸라 소장품인 동물문 견갑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자의 농경문 청동기를 들 수 있다.
동물문 견갑의 경우는 겉면을 둘로 구분하고 한쪽엔 호랑이를, 그리고 다른 한족엔 사슴 두 마리를 음문으로 표현했다. (그림 2)

호랑이는 꼬리가 지나치게 길고 사슴들은 뿔이 유별나게 크게 표현돼 있지만 이 동물들의 신체적인 특색이나 동작은 대체로 앞에 살펴본 반구대 암각화의 경우처럼 요점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아무런 배경 없이 공간을 메우듯이 표현된 이 동물 문양은 당시 장인들의 뛰어난 묘사력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이 동물 문양 중에서 사슴 한 마리에는 화살이 꽂혀 있어 수렵과 유관한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당시의 호랑이 숭배 사상이나 사슴 숭배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농경문 청동기는 의기로 사용됐던 것인데 앞뒷면에 모두 회화적인 문양으로 새겨져 있으며 주변을 거치문대 등으로 돌려 치고 다시 표현 공간을 세 겹의 격문대로 양분하고 있다.(그림 3)

이와 같은 평면 공간의 구획 처리와 새겨진 문양의 양식은 기본적으로 동물문 견갑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이 농경문 청동기의 앞면에는 고리가 달려 있는데 이 고리가 달려 있는 앞쪽의 평면에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고리의 바로 위쪽에는 두 갈래진 나뭇가지 위에 반점이 찍힌 두 마리의 큰 새가 각각 한 마리씩 서로 마주보듯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새들의 모습은 내몽고와 남부 러시아에서도 성행됐던 것으로 현세와 천계를 연결하는 종교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믿어진다.

나무의 동체와 두 갈래진 큰 가지만을 나타냈을 뿐 잔가지나 잎의 표현은 철저하게 배제돼 있다.
표현상의 가장 중요한 에센스만을 제한된 공간에 적절히 포치해 다뤘음을 알 수 있다.

이 청동기의 뒷면에는 청동기시대 농경생활의 두 가지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그림 3)
오른쪽에는 농구로 밭을 갈거나 파는 인물들을, 왼쪽에는 곡식을 털어서 망을 씌운 항아리에 담으려는 듯한 모습의 인물을 표현했다.
이 장면들은 밭갈이로부터 추수까지의 농작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제사를 지내는 봄과 가을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아무튼 인물들의 모습이나 동작이 간결하면서도 매우 효율적으로 묘사돼 있으며 또한 아직 초보적이긴 하지만 제법 서사적인 표현이 시도되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그리고 네모진 밭을 가는 인물이 성기를 노출하고 있는 것은 역시 다산과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반구대의 암각화와 이러한 청동기 문양들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말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동물이나 인물 또는 사물의 요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간략하게나마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또 비록 초보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서술적인 표현이 시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선각화는 흔히 사슴과 인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본 야요이시대 동탁의 문양들과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

특히 절구질을 하는 인물들과 실을 감는 인물의 모습을 담은 시코쿠 카가와 현 출토의 1세기경 동탁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미술과 관련해 큰 주목을 끈다. 

청동기시대 말부터 삼국시대 초에 이르는 수세기 동안의 철기시대, 또는 원삼국시대에 제작된 회화성이 강한 미술 작품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철기나 목기 등에 회화적인 표현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겠으나 녹슬거나 썩어 없어진 까닭에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선사시대는 우리나라 회화 사상 하나의 큰 공백기로 남아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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