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회화

본지는 앞으로 안휘준 교수의 著書 『한국회화사』를 연재하려고 한다.
선사시대의 선각화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繪畫 그리고 조선왕조 초기·중기·후기·말기의 회화에 대한 안휘준 교수 특유의 문체와 시각으로 한국의 회화사를 조망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한다.(편집자주)

 

무용총 바로 옆에 위치하고 연대도 대개 비슷하리라고 믿어지는 각저총의 씨름 그림도 주목을 끈다.<그림 1>

그림 1 : 각저총의 씨름도, 고구려, 5세기경
그림 1 : 각저총의 씨름도, 고구려, 5세기경

현실의 동쪽 벽에서 그려진 씨름그림은 나무 밑에서 씨름을 하는 두 역사와 심판을 보는 듯한 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인의 머리 위쪽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조문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나무쪽에 위치한 역사는 크고 길게 째어진 눈이나 큼직한 매부리코로 봐 고구려 사람이기보다는 서역인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이 점은 고구려 벽화 고분의 상당수가 중앙아시아 계통의 말각조정의 천정을 지니고 있고 그 밖에 각종 문양에도 중앙아시아적인 요소들이 보이고 있는 사실과 관련해 매우 흥미롭다.

이 인물들의 모습에 못지않게 재미있는 것은 산수화의 주요 구성 요소의 하나인 수목의 형태와 풍속화적인 분위기이다.
큰 가지들의 모습은 대체로 사실적이지만 한대 화상석에 표현된 나무들처럼 가지의 끝은 ‘손바닥 위에 주먹밥을 올려놓은 듯한’ 형태를 하고 있을 뿐 나뭇잎들이 아직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즉, 전체적으로 나무가 아직도 진실로 나무다운 양태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뭇가지들 여기저기에 새들이 앉아 지저귀는 듯한 광경은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더해 주고 풍속화적인 느낌을 훨씬 강하게 해준다. 
또한 이 나무는 윤곽선이 전혀 없이 채색으로만 처리돼 몰골화처럼 표현돼 있어 뚜렷한 윤곽선으로 정의된 구륵화적인 인물화법과 큰 대조를 보여준다.
이 점도 이 시대의 회화에서 주목되는 사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들이 기둥과 서까래 등 현실세계의 목조건축을 그림으로 재현해 놓은 벽면에 그려져 있는 점도 주목을 끈다.

고구려 후기 벽화고분은 진실과 측실이 없어지고 현실과 연도만이 남아 있는 게 상례인데 대개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것이다.
이 시기의 벽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종래의 천정부에 작게 나타났던 사신도가 네 벽을 차지하게 되고 묘주와 관계되는 장면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 사실이다.
즉, 묘주에 관한 기록적인 또는 설명적인 장면과 풍속화적인 요소들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 
또 천정의 중앙도 중기에는 만개된 연꽃이 그려져 불교적인 색채를 짙게 띠었었으나 이 시대에는 그 부분에 일상과 월상이 그려지게 됐다.
이 변화들은 종래에 강세를 나타냈던 불교적 요소가 쇠퇴하고 오히려 도교적 색채가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후기 벽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강서대묘, 통구사신총, 진파리1호분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시기의 벽화는 보다 세련되고 힘차며 채색도 더욱 선명하다.
또 산수화도 전에 비해 좀 더 발달된 모습을 보여준다.
판석으로 이뤄진 강서대묘의 현실 북쪽 석벽 위에 직접 그려진 현무도를 보면 거북을 휘감은 뱀의 유연한 자태, 그것이 이루는 아름다운 타원형의 구성, 선명한 채색의 배합 등 율동적인 생동감과 활력에 찬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다.<그림 2>

그림 2 : 강서대묘의 현무도, 고구려, 6세기 말~7세기 전반
그림 2 : 강서대묘의 현무도, 고구려, 6세기 말~7세기 전반

또한 이 고분의 현실 벽과 천정받침에는 나무가 서 있는 산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산과 산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공간이나 거리가 나타나 있고 또 산에 나 있는 나무들도 이제 제법 나무다워져 있다.<그림 3>

그림 3 : 강서대묘의 산악도, 고구려, 6세기 말~7세기 전반
그림 3 : 강서대묘의 산악도, 고구려, 6세기 말~7세기 전반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주목되는 것은 이 강서대묘의 서북쪽 천정받침에 그려진 산악도에는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준법의 시원형이 나타나 있다고 하
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밝혀진 산의 주름을 나타내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로 매우 중요하다.

강서대묘에 보이는 산악도와 유사한 그림은 이 밖에 내리1호분의 혐실 동북쪽 천정받침에도 그려져 있다.
이렇듯 후기의 고분벽화에는 전에 비해 산악도들이 자주 그려진 듯하며 일반적으로 구도나 공간 개념 그리고 산다운 분위기의 표현에서 중기의 무용총, 수렵도에 나타나 있는 산의 모습보다는 훨씬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이 점은 역시 후기에 속하는 진파리1호분의 현실 북쪽 벽의 수목도에서도 입증이 된다.<그림 4>

그림 4 : 진파리1호분의 수목도, 고구려, 7세기 전반
그림 4 : 진파리1호분의 수목도, 고구려, 7세기 전반

이 그림에서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큰 나무들이 좌우에 서 있고 그 사이에 현무가 선묘로 그려져 있는데 나무의 가지와 잎이 상당히 유연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또 현무 위의 하늘에는 리듬에 맞춰 춤추는 듯한 인동, 비운, 연화 등이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그런데 바람에 날리는 듯 동감이 강한 이 나무들의 모습이나 화면의 좌우에 나무를 배치하고 그 사이의 공간에 중요한 소재를 묘사하는 식의 구성은 육조시대의 미술에서 엿볼 수 있는 특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구려의 이 그림은 육조시대의 중국의 미술보다도 더욱 율동감이 강하고 유연하다. 

이처럼 고구려 후기 벽화에서는 고구려적인 특색이 그 전보다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또한 산수화가 훨씬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등 회화사에 하나의 새로운 국면을 드러내 준다.
고구려의 회화는 또한 뒤에 살펴보듯이 백제와 신라는 물론 일본 회화의 발전에는 많은 기여를 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따라서 고구려의 회화는 한국미술사 상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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