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박사는  1944년 6월 8일 미 국무부 극동분과의 다이코버 (Dichover) 에게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을 약속한 만큼 우리나라의 경제문제 등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한국경제 개요 Korea Economic Digest 의 첫 주제 사본이 귀하에게 우송되었습니다. 우리는 귀하가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하기를 희망합니다. 귀하께서 그 내용 즉 협회 Society 의 목적과 우리의 계획업무에 대해 검토한 후에 우리에게 솔직하게 편리를 주신다면 우리는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그 귀하의 의견에 우리가 하고 있는 업무가 태평양전쟁 수행에 어떠한 실질적 도움이 되든지 간에 우리에게 서신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업무가 카이로 회담에서 자유와 독립이 선포된 전후 한국의 독립에 어떤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계획이 국제 무역관계의 진전에 어떠한 것이라도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유일한-

이에 관해 다이코버는 이틀 후인 6월 10일 전적으로 흥미를 갖고 언제든지 함께 만나 한국의 경제문제 등에 관해 협의하고 토의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회답을 보내왔다.

유일한 박사의  이 무역관계 서신은 독립운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그는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 Asia and America」라는 저널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라는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다. 당시 유일한은 미군 정보국의 자문위원으로 있었으며 국제뉴스에 신속하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빨리 전쟁의 귀추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승리로 전쟁이 종식된다면 한국의 자주독립은 필연 적으로 뒤따를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유일한 박사는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에서 고된 군사훈련을 받은 이후 1945년 냅코작전에서 국내 정진 제1조 책임자로 특수훈련을 받기까지 30여 년간을 항일독립운동에 전념하면서도 민족기업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니 그의 기업활동은 결국 독립운동의 한 방략이었다.
 

 

유일한과 태평양 문제조사회(IPR)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에 대해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라고 명시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 받았다. 그 후 1945년 1월 1일부터 1월 29일까지 미국 버지니아주 핫 스프링 Hot Spring에서 개최된 태평양 연안의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 한 태평양문제조사회에서는 한국이 해방 후 6개월 이내에 반드시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보다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결의를 하여 미주 인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 대회에 전경무 · 유일한 · 정한경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전후 일본의 처리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유일한 박사는 일본이 침략하여 약탈해 간 제조공장 등에 대해 UN감시하에 조속한 시일 내로 약탈국이 즉각 보상해야 한다고 심도있게 합의했다. 또 IPR은 오랜 토론 끝에 전후 일본의 처리문제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6가지 단계를 합의했다.

1.천황제도를 폐지하고 히로히토와 그의 추앙자들은 어떠한 비난 도 감내해야 하며 군대의 철폐와 평화조약에 대한 승인을 한다.

2.군조직의 와해는 물론 산업 경영자, 공업가, 실업가, 제조업자도 전범자로 기록한다.

3. 언론 집회의 자유와 선거를 통한 1880년의 헌법 개정은 물론 민주주의 법을 채택할 수 있다.

4. 일본군은 대만, 만주로부터 철수하고 카이로 선언에 따름과 동시에 일본 남쪽의 류구, 북쪽의 쿠릴열도를 UN의 해군과 공군의 전략기지로 사용케 한다.

5. 일본 정부나 왕족의 모든 재산은 연합국이 보상 없이 점유할 수 있다.
6. 여타 지역의 모든 일본인을 즉각 본국으로 귀환 조치한다."

 

유일한 사장이 남긴 많은 어록에는 그의 가치관과 일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유일한 박사는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가 있다’는 일념 하에 유한양행을 운영하고, 독립운동을 펼쳤다.

유일한 사장은 회사보다 학교를 더 자주 방문할 정도로 교육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는 학생들에게 인문교육과 기술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에 봉사하는 인간다운 기술자를 양성하는데 힘썼다. 그리고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등의 말을 남긴 유일한 박사는 그의 기업가정신을 마지막까지 실천하고, 영면했다.

<유일한 사장 약력>
1895.1. 15. 평안남도 평양에서 유기연의 6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산 
1904 대한제국의 박장현 순회공사를 따라 도미
1919 미국 미시간대학교 상과 졸업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名)하는 결의문' 공동 작성 및 낭독
1922 라초이 식품회사 설립
1925 호미리 여사와 결혼, 21년 만의 가족상봉
1926. 12. 10. 귀국 후 유한양행 설립
1936.6.20.법인체 주식회사로 (주)유한양행 발족
1941 미국 남가주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 취득
1942 미국에서 항일무장 독립군 맹호군 창설주역
1945 미육군전략처(OSS)의 지하 항일투쟁계획인 냅코작전 특수공작원으로 활동
1946 귀국하여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
1948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국제법 수학
1962 유한양행 주식 상장, 학교법인 유한학원 설립
1964 유한공업고등학교 설립
1965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 취득
1970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현 유한재단)설립
1971.3.11.76세를 일기로 영면, 유언장을 통해 전 재산 사회 환원

<유일한 사장 상훈>
1963.12. 6. 국가공익포장 표창
1964. 5. 12. 우량상공인 표창
1968. 3. 4.동탑산업훈장 수훈
1970.8.15.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1971.5.3.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1991.10. 9.중앙대학교 참경영인상 추서
1995.8.15.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96. 6. 1. 정부로부터 '6월의 문화인물 및 독립운동가'로 선정
1998. 8.'한국을 빛낸 역대 인물'로 선정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매일경제신문)
1999. 10.'가장 존경받는 기업가'로 선정 (월간조선)
2004. 4.정부로부터 제1회 '이 달의 기업인' 선정 경인국도 부천구간을 '유일한로'로 명명 (기업인 최초)
2009. 5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 100인으로 선정(한국조폐공사 '한국인 인물시리즈 기념메달' 기업인 최초로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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