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덕원빌딩 사옥에서 기초를 닦은 유한은 1929년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길 건너편 YMCA로 이사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접어 들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한의 사세는 눈부시게 확장됐다. YMCA 사옥으로 불편을 느껴 다시 신문로 언덕배기의 160평 대지를 매입하여 2층 양옥을 지어 이사한 것은 1932년이었으니 YMCA로 이사한 지 불과 3년만이었다. 이 무렵 유일한 사장은 사원들에게

① 항상 국민보건을 위해 일해야 한다.
② 우리 민족이 일본민족보다 못하지 않다는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③ 유한은 결코 개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며 이 길을 통하여 경제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조회 때 마 다 강조했다고 하니 이것이 유한의 사시요 기업 정신이다.

그러나 유한의 이러한 사세확장에도 불구하고 내용면을 들어다 보면 당시 총독부의 일방적인 비호 아래 일본인 제약업자들의 한국시장 점령은 매우 심각했다. 압도적으로 많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병원은 말할 것도 없고 각 도에 설립된 도립병원은 일본 제약회사들이 전부 장악하여 약품과 의약품 공급은 일본인들이 독점했다.

그러나 유한도 결코 이에 뒤지지 않았다. 경쟁의 승패는 어느 쪽이 더 많은 시장을 차지하느냐에 달린 것인데 유한은 우선 한국인 경영의 의약품도매상과 약국 등을 포섭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다른 방법은 외국인 계통의 거래선을 트는 일이었다. 특히 외국인 계통의 병원과 의원 개척은 유일한이 직접 나섰다. 세브란스를 비롯한 기독교 관계의 외국인과 친분이 많았던 것이 큰 힘이 됐다. 또 전국 선교사 구역마다 설립되어 있는 선교사 병원을 전부 거래선으로 개척하는데 성공했으니 일본인 제약사들이 차지한 도립병원 못지않은 큰 시장을 획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후반기에 벌써 외화획득의 의의와 필요성에 대한 안목을 가진 유일한의 기업경영은 우리나라 각 지방의 특산물인 돗자리, 화문석, 도자기, 죽세품과 해산물을 수출하고 의약품과 위생재료, 화장품 수입 등 수출입을 병행했다. 그 대상국은 주로 미국의 유명 제약회사였으며 부대사업으로 일본 우편선 회사와 캐나다 정부철도·동경해상화재보험회사 대리점, 미국의 생명보험회사와 선박회사 대리점도 병행했다. 이러한 다각적인 경영에 사장 이하 전사원의 활약이 눈부시었으니 사세가 크게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사세확장 등 유한의 성장기 1936~1941인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는 전쟁의 공포와 위협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불어 닥친 시기였다. 1929년 미국에서 비롯된 경제공황은 순식간에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은 국내 경제파탄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1931 년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1932년에는 상해를 침범했으며 1937년 7 월 7일 북경 교외의 노구교에서 철도 폭파사건을 조작해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무서운 기세로 남경까지 점령했다. 또한 비무장지대나 다름없는 동북삼성 을 점령하고 이듬해 만주에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이는 일제의 대륙침략과 세계 제패의 야욕이 표출된 것이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지 동북삼성 만주를 제2의 식민지로 만들고 중국대륙까지 군사 및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만주사변이 중국대륙의 침략행위로 번져나갔고 태평양전쟁 1941으로 확대되 어 가는 씨앗으로 배태됐다. 이와같이 누구도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세계의 암운이 태평양 동쪽 군국주의 일제의 침략 주모자들 속에서 은밀하게 싹트고 있었다.

 

일본은 아시아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나치 독일,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쇼와 동맹을 맺고 미국의 세력을 아시아에서 절멸시키려는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유한양행의 사세는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매우 왕성하게 발전해 만주까지 기업을 확장했다.

유럽은 이미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아시아로 진출할 길이 막혔고, 러시아와는 불가침조약을 맺어 외교적 안정을 구축한 일제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시키려면 동북삼성과 중국대륙을 완전히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의 군국주의 지도자들은 동남아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하려면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미국과 일전을 감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이니 일본 국내는 물론 한국과 동북삼성 일대는 전시 체제로 개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일한은 무 역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미주로 건너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출처: 민족기업인 유일한은 독림운동가였다 김시우 著 올댓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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