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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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인상주의'는 대략 1890년대에서 1905년 사이에 프랑스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비평가 로저 프라이(1866-1934)로, 그는 이 명칭을 그저 '인상주의 이후의 흐름' 이라는 가벼운 뜻으로 사용했다. 그렇기에 이 말은 종종 신인상주의․상징주의․야수주의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실제로 프라이가 1910년에 개최한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자들' 전시회에는 고흐․고갱․세잔 외에 신인상주의자인 쇠라, 야수주의자인 마티스․드랭․블라맹크의 작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후기 인상주의'라는 말은 대체로 고흐․고갱․세잔으로 대표되는 경향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된다. 여기에서는 이 일반적 용례를 따르기로 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화상(畵商)으로 일하다가 도중에 종교에 귀의하여 선교사가 된다. 벨기에 남부에서 개신교 포교 활동을 하던 그는 1881년에야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아인트호벤 근처의 작은 마을인 뉘넨에서 주로 정물이나 농민들의 삶을 그리면서 지낸다. 여기서 제작된 '농민 생활 습작들'(1881~1885)은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여준다. (그림 1)

(그림 1) 바느질하는 스헤베닝언의 여인. 빈센트 반 고흐. 1881~1882년
(그림 1) 바느질하는 스헤베닝언의 여인. 빈센트 반 고흐. 1881~1882년

뉘넨 시절의 고흐는 밀레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의 [감자를 심는 농부와 그의 아내]는 어딘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닮았다. 이 습작기에는 화면을 거의 어두운 갈색의 모노크롬으로 처리하는 특유의 스타일이 정점에 달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다. (그림 2, 3, 4)

(그림 2) 감자를 심는 농부와 그의 아내. 빈센트 반 고흐. 1885년
(그림 2) 감자를 심는 농부와 그의 아내. 빈센트 반 고흐. 1885년

 

(그림 3) 이삭 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아 밀레. 1857년
(그림 3) 이삭 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아 밀레. 1857년

 

(그림 4) 감자를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1885년
(그림 4) 감자를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1885년

기법의 측면에서 이 스타일은 물론 전형적인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경우 후기의 화려한 색채는 아직 보이지 않으나 인물의 형태는 이미 표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이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느끼는 대로 그린 것, 다시 말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인상(impression)이라기보다는 안에서 밖으로 나간 표현(expression)에 가깝다.

이것은 그가 존경한 도미에의 영향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주의는 이미 아득한 과거의 언어였다. 어느 편지에서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왜 자기 그림을 팔지 못하느냐고 불평한다. 닦달하는 형에게 테오는 인상주의가 지배하는 파리에서 색채 없는 화면은 인기가 없다고 대답한다.

자신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느낀 고흐는 1885년 안트베르펜으로 이주해 집중적으로 색채론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팔레트에 카민 레드와 코발트블루, 그리고 에메랄드그린을 첨가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고, 일본의 우키요에를 수집하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된 것도 그곳에서의 일이다. 안트베르펜에 머무는 동안 고흐는 예술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운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너무나 거칠고 야성적인 나머지 그곳의 선생들과 번번이 갈등만 일으킨다. 결국 그는 학교를 포기하고 파리로 간다. 1886년 파리로 이주한 고흐는 본격적으로 동시대의 언어들을 습득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의 화면은 인상주의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에 있을 때보다 훨씬 밝아진다. (그림 5)

(그림 5) 갈레트의 풍차. 빈센트 반 고흐. 1886년
(그림 5) 갈레트의 풍차. 빈센트 반 고흐. 1886년

파리에서 고흐는 피사로와 쇠라. 시냐크, 에밀 베르나르, 폴 고갱과 같은 화가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에게 인상주의적으로 색채를 더 쓰라고 권고한 사람은 고갱이었다. 파리의 고흐는 인상주의․분할주의․상징주의 등 당대의 여러 언어를 습득하는 한편, 틈틈이 일본의 목판화를 베껴 그리곤 했다. (그림 6, 7)

(그림 6) 파리 일뤼스트레 표지
(그림 6) 파리 일뤼스트레 표지

 

(그림 7) 오이란(게사이 에이젠 모작). 빈센트 반 고흐. 1887년
(그림 7) 오이란(게사이 에이젠 모작). 빈센트 반 고흐. 1887년

일본 목판화는 그 이국적 색채와 형태, 그리고 구도로 인상주의 이래 파리의 화가들을 매료시켜왔다. 1887년 파리 근교의 아니에르로 이주한 고흐는 거기거 시냐크를 만나 그에게서 점묘법이나 보색대비와 같은 신인상주의 기법을 받아들인다. [아니에르의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분할주의의 양향을 잘 보여준다. 파리에 사는 동안 고흐는 모두 200여 점의 그림을 제작한다. (그림 8)

(그림 8) 아니에르의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빈센트 반 고흐. 1887년
(그림 8) 아니에르의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빈센트 반 고흐. 1887년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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