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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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은 자신의 여행 잡지에서 타히티의 열대 풍경이 “그 강렬하고 순수한 색채로 눈부시게 하고, 눈멀게 했다.”라며, 작열하는 태양 아래 금빛으로 빛나는 시내와 해변의 대상들을 화폭에 담아내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오! 이 낡아빠진 유럽의 전통이여! 퇴화한 인종들의 끔찍한 표현 방식이여! (그림 1)

 

(그림 1)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 1897년
(그림 1)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 1897년

 

하지만 고갱은 곧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실은 얼마나 간단한지 깨닫게 된다. ‘많은 생각 없이 그냥 파랑 옆에 빨강을 배치’하면 된다는 것이다. 타히티에서 그린 그의 그림들은 원색의 강렬한 표현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고갱이 원시의 풍경에서 그저 새로운 조형 원리만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타히티 사람들을 턱없이 이상화하여 그들에게 지고의 고상함과 순결함을 부여한다. 그의 눈에는 그들이 장 자크루소가 말한 ‘고상한 야만인’으로 비친 모양이다. 때 묻지 않은 원시사회에서 고갱은 타락한 서구 문명을 구원할 새로운 정신성을 보았다. 타히티의 그림들은 그저 원색의 향연에 불과한 게 아니다. 동시에 그곳에서 발견한 새로운 정신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문명은 점차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웃을 거의 미워하지않게, 아니 아예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삶의 모든 기쁨을 즐기고 있다. 인간적 기쁨만이 아니라 동물적 기쁨까지도, 나는 일체의 인공적인 것, 일체의 관습, 일체의 습관을 없애버렸다. 나는 진리에, 자연에 더 가까워졌다.

고갱은 현대미술의 선구자였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훗날 현대미술의 원리가 될 몇 가지 경향들을 볼 수 있다. 첫째, 추상주의의 경향이다. 그의 작품에서 형과 색은 재현의 의무에서 풀려나 그 자체가 자율적인 조형 요소가 되려 한다. 현대 회화는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형과 색의 자유로운 유희에 가깝다. 모니스 드니는 고갱을 통해 회화가 ‘특정한 질서로 배열된 색채들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풍성한 관념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림 2)

 

(그림 2) 부적. 폴 세뤼시에. 1888년
(그림 2) 부적. 폴 세뤼시에. 1888년

 

고갱이 부아 다무르 숲 앞에서 묻더군. “이 나무가 어떻게 보이나? 녹색이지, 그치? 그럼 팔레트 위에 녹색을 풀게.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녹색을. 그리고 저 그늘, 그건 차라리 파랑으로 보이지? 그럼 망설이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파랑으로 그리게.

이 충고에 따르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폴 세뤼시에의 [부적]을 보자. 고갱이 있는 자리에서 그려진 이 작품은 거의 현대의 추상에 가깝다. 이처럼 색채가 재현의 의무에서 풀려나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의미를 획득할 때 화면은 자연스레 또 다른 경향을 띠게 된다. 바로 상징적 경향이다.

고갱은 가시적 현실의 재현을 넘어 비가시적 관념을 표현하려 했다. 그로써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 한다는 현대미술의 상징적 경향을 예고한 셈이다. 한편, 고갱의 노골적으로 반(反)문명적 성향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거기에서 우리는 루소의 원시주의는 물론이고, 훗날 마티스의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로까지 이어질 새로운 정신성을 엿보게 된다.

후기 인상주의가 막을 내리는 1905년은 현대미술의 첫 주자인 야수주의 운동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그 신호탄이 바로 마티스의 [삶의 기쁨]이었다. 마티스는 이 작품을 먼저 신인상주의 기법으로 그린 바 있다. 그는 분할주의를 포기하고 스타일을 고쳐 그림으로써 현대미술의 첫 주자가 된다.

오늘날 이 작품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더불어 현대미술의 효시로 꼽힌다. 이 작품에는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윤곽선을 그려 안쪽을 원색의 평면으로 처리한 데에서는 클루아조니슴의 흔적이, 인물들을 벌거벗겨 놓은 데에서는 원시주의의 자취가, 정체 모를 저 수수께끼 같은 공간에서는 상징주의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림 3)

 

(그림3) 삶의 기쁨. 앙리 마티스. 1906년
(그림3) 삶의 기쁨. 앙리 마티스. 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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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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