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순수 인상주의자들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쿠르베와 코로를 모범으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피사로 역시 출발점은 사실주의였다. [잡담하는 해변의 두 여인]은 그가 태어난 세인트토머스섬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속하는 이 섬은 당시에는 덴마크령이었다. 현실에 서는 평범한 인물을 그렸다는 점은 명백히 사실주의적이나, 차분히 가라앉은 화면은 고전주의의 느낌을 주고, 흑인 여성이 등장하는 이국적 풍경에서는 낭만주의적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이 시기의 피사로 작품은 그가 스승으로 여긴 쿠르베와 코로의 영향을 보여준다. 피사로가 인상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1869년 파리 근교의 루브시엔에 정착한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인상주의 스타일을 발전시킨다. (그림 1)

▲ (그림 1) 잡담하는 해변의 두 여인. 카미유 피사로. 1856년
▲ (그림 1) 잡담하는 해변의 두 여인. 카미유 피사로. 1856년

[루브시엔의 베르사유로 가는 길]은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향하는 피사로의 도정을 잘 보여준다. 하늘과 대지가 거친 붓질로 처리되어 있고, 쌓인 눈 위로 드리운 그림자로 겨울 햇빛의 효과를 드러내는 것 등은 전형적인 인상주의 효과다. 인상주의자답게 피사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루브시엔의 풍경을 여러 번 반복해 그리곤 했다. (그림 2)

▲ (그림 2) 루브시엔의 베르사유로 가는 길. 카미유 피사로. 1869년
▲ (그림 2) 루브시엔의 베르사유로 가는 길. 카미유 피사로. 1869년

사실 인상주의 운동에서 피사로의 역할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피사로가 인상주의의 ‘개발자’이고 모네는 ‘실행자’였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모네가 기법의 대부분을 개발했고 피사로는 ‘조언자’에 그쳤다는 평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피사로의 영향력은 인상주의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루브시엔의 베르사유로 가는 길]을 다시 보자. 화면 속 행인의 복장과 나뭇가지의 두꺼운 스트로크들이 마치 화면을 구축하는 블록처럼 느껴진다. 바로 이 요소가 훗날 세잔의 후기 인상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세잔은 피사로가 루브시엔에서 그린 풍경을 여러 번 반복해서 베껴 그리곤 했다. 세잔이 피사로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얀 서리]는 최초의 인상주의전에 출품한 다섯 점 중 하나로, 첫 눈에 보아도 확연히 인상주의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피사로가 밭고랑과 나무의 규칙적 배열을 통해 화면에 ‘구조’ 혹은 ‘구성’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상주의 회화는 빛의 효과에 주력하다가 구조나 구성을 등한시한 나머지 대상들을 실체 없는 물그림자처럼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세잔은 인상주의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인상주의로부터 박물관 예술처럼 뭔가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만들고 싶었다.” 라고 토로한 바 있다. 피사로는 인상주의에 불만을 품은 세잔이 후기 인상주의로 넘어갈 때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그림 3)

▲ (그림 3) 하얀 서리. 카미유 피사로. 1873년
▲ (그림 3) 하얀 서리. 카미유 피사로. 1873년

[하얀 서리]는 언뜻 보면 반 고흐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피사로는 젊은 고흐에게 자신의 기법을 전수해주시도 했다. 다른 한편, 작품의 색채에서는 벌써부터 신인상주의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1880년대 들어와 피사로는 쇠라와 시냐크가 발명한 점묘법을 화면에 받아들인다.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올바른 방향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실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는 대신에 화면 위에 병치시키는 인상주의 기법이 분할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에라의 건초 수확]은 점묘를 이용한 분할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마 신인상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 신념을 공유한 점도 피사로가 그들의 운동에 몸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림 4)

▲ (그림 4) 에라의 건초 수확. 카미유 피사로. 1887년
▲ (그림 4) 에라의 건초 수확. 카미유 피사로. 1887년

하지만 18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피사로는 신인상주의 특유의 과학주의가 예술적 자유를 제약한다고 느끼게 된다. 이제 그는 외려 쇠라와 시냐크에게 신인상주의를 버리라고 설득하면서, 자신은 1870년대의 인상주의 화풍으로 돌아간다. 이즈음에 피사로는 우연히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에 그렸던 로리 파크 애비뉴의 그림을 본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그 시절의 작업들이 예술적 성취가 가장 컸다고 느끼고, 혹시 그 시절과 비슷한 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 싶어 다시 영국으로 떠난다. 이 시기에 그가 1870년대의 화풍을 반복하는 데에 그친 것은 아니다. [하이드 파크]는 여전한 인상주의 속에서도 강렬한 색채로 벌써 후기 인상주의의 표현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 5, 6)

▲ (그림 5) 시드넘 거리. 카미유 피사로. 1871년
▲ (그림 5) 시드넘 거리. 카미유 피사로. 1871년

 

▲ (그림 6) 하이드 파크. 카미유 피사로. 1890년
▲ (그림 6) 하이드 파크. 카미유 피사로. 1890년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저작권자 © 덴탈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