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럽의 시대정신

본 지는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을 연재하려고 한다. 인상주의는 미학사에 있어 그 의의는 상당하다. 현대미술의 시초가 되는 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대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진중권의 미학의 눈으로 보는 현대미술의 태동을 찾아가길 바란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프랑스에서 시작한 사실주의 운동은 독일을 넘어 멀리 러시아에까지 전파된다. 당시 러시아에서 쿠르베나 멘첼의 역할을 한 것은 일리야 레핀이다. 그의 데뷔작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사실주의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볼가강 변의 모래톱 위로 열한 명의 인부가 가죽끈에 몸을 묶어 볼가강에 떠 있는 배를 예인하고 있다.

곧 탈진할 것만 같은 인부들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위엄을 거부당한 채 소나 말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다. 아마도 사회적 불평등과 비인간적 노동조건에 대해 예술적으로 이보다 더 강렬히 항의할 수는 없으리라. 레핀은 국토 순례를 하던 중에 마주친 인물과 사건에 기초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 1)

▲ (그림 1)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일리야 레핀. 1870~1873년
▲ (그림 1)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일리야 레핀. 1870~1873년

이 작품으로 예술적 성공을 거둔 후 레핀은 이른바 ‘방랑자(순회파)’ 그룹에 가입한다. 방랑자 그룹은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뛰쳐나온 열네 명의 학생이 결성한 모임을 모체로 1870년에 결성된 예술가 단체다. 그들은 아카데미의 교육이 너무 보수적이며,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적 화풍을 고집하는 그곳의 규칙이 너무 억압적이라 느꼈다.

또한 그들은 고급한 장르와 저급한 장르를 차별하는 아카데미의 관습을 거부하고, 비루한 민중 속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화폭에 그들의 삶을 담으려 했다. 그들은 스스로 민중의 예술적 호민관이 되어 한편으로는 억압과 착취, 사회적 불평등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일상을 관찰하며 그들의 삶의 건강함을 찬양하려 했다. (그림 2)

▲ (그림 2) 쿠르스크 지방의 부활절 행렬. 일리야 레핀. 1880~1883년
▲ (그림 2) 쿠르스크 지방의 부활절 행렬. 일리야 레핀. 1880~1883년

러시아 사실주의자들은 그저 민중을 회화의 주인공으로 삼는 수준을 넘어 그들을 예술적 수용의 주체로 만들려 했다. 이 강력한 ‘민중성’이 다른 나라의 것과 구별되는 러시아 사실주의 고유의 특성이다. 러시아 사실주의자들은 당시에 정치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민중주의자’의 예술적 대응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체제에 대한 예술적 비판은 종종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곤 했다. 1905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난다. 이 봉기는 차르의 군대에게 무참히 진압당하나, 이 한 해 동안 레핀은 수많은 시위에 참기하며 그 장면을 스케치로 남긴다. [1905년 10월 17일의 시위]는 그 때의 체험에 기초해 그린 작품이다. 당대의 현실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의 정신은 여전하나, 화풍이 인상주의에 가까워졌다. (그림 3)

▲ (그림 3) 1905년 10월 17일의 시위. 일리야 레핀. 1907년
▲ (그림 3) 1905년 10월 17일의 시위. 일리야 레핀. 1907년

같은 사건을 다룬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 광장에서]는 확연히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이다. 이는 레핀이 사실주의에 충실하면서도 동시대의 예술 언어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절 프랑스에서 사실주의는 이미 가득한 과거의 언어였다. (그림 4)

▲ (그림 4)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 광장에서. 일리야 레핀. 1905년
▲ (그림 4)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 광장에서. 일리야 레핀. 1905년

사실주의의 또 다른 배경은 19세기부터 본격화한 산업혁명이다. 산업화는 사회의 풍경을 급진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산업혁명은 적어도 시민계급에게는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이른바 ‘모던’ 라이프스타일도 실은 산업화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로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가 모든 이에게 풍요를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생산의 기계화는 숙련된 노동의 가치를 저하시켜 노동자계급을 빈곤층으로 전락시켰고, 전통적 농업의 가치 역시 절하되어 농민들 역시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술적 진보가 민중의 삶의 실질적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 상황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급진적 혁명 사상을 낳기도 했다.

또 한 가지 사실주의의 배경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지각 방식의 변화다. 19세기에 과학주의 혹은 실증주의가 사회의 지배적 사고방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람들은 이른바 ‘아우라적 지각’에서 벗어나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 산문적 세계에서는 그동안 회화에 제재를 제공해주었던 신화·성서·역사 혹은 낭만적 환상의 세계는 당연히 설 자리를 잃는다.

카메라의 발명과 보급 역시 현실에서 아우라를 벗겨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각의 수단이 육안에서 렌즈로 바뀜으로써 세계는 시적 분위기를 잃어버리고, 냉정한 관찰과 기록의 대상이 된다. 한마디로 사실주의는 이 변화한 지각 방식에 조응하는 예술 양식이었다.

이에 따라 ‘사실주의’라는 말도 크게 세 가지 상이한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먼저 ‘대상의 사실적 묘사’라는 의미. 이 경우 사실주의는 사실상 자연주의의 동의어가 될 것이다.

둘째는 ‘당대 사회의 묘사’라는 의미. 사실주의는 산업혁명의 결과로 출현한 ‘모던’의 사회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법으로서 자연주의와 뚜렷이 구별된다. 셋째는 ‘현실의 비판적 묘사’라는 의미. 사실주의의 바탕에는 종종 부당한 현실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 정신이 깔려 있다.

물론 어떤 것이 사실주의 회화라 불리기 위해 이 세 조건을 모두 갖추어져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실주의자 도미에의 작품은 그리 자연주의적이지 않고, 사실주의자 멘첼의 작품은 그리 정치적이지 않았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현실의 변혁’이라는 의미다. 이미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자들은 예술을 사회변혁의 정치적 무기로 여겼다. 이 전통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1934년에 채택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강령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낡은 현실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현실을 건설하는 과정을 그리려 한다.

하지만 가장 혁명적이어야 할 정권이 예술 정책에서 19세기의 언어로 퇴행하는 미학적 반동을 저질렀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판적 리얼리즘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민중성의 원칙은 당성의 원칙으로 교체된다. 민중에 대한 사랑이 당에 대한 충성으로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그림 5)

▲ (그림 5) 볼셰비키.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1920년
▲ (그림 5) 볼셰비키.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1920년

 

다음 호에 계속 ▶

 

목차
0. 고전미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고전미술의 붕괴
2. 유럽의 시대정신
3. 혁신을 위해 과거로
4.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5. 인상주의의 탄생
6. 순수 인상주의자들
7. 인상주의를 벗어나다
8. 색채와 공간의 분할
9. 현대미술을 예고하다
10. 지각에서 정신으로
11.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
12. 감각을 실현하라
13.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14. 모더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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