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상 인상주의 역할은 상당하다. 인본주의를 모토로한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달 곧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초상화만을 그리는 직업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는 시초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린다의 인상을 그대로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인상주의의 출현은 화가의 시각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시초를 닦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세잔느의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게 되는 큰 흐름이 된다.

이에 본지는 세잔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이어 샤피로의 폴 세잔느를 인용하여 독자들의 미술세계를 넓히고자 한다. 읽어가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점점 더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감성의 세계에도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프랑스 혁명으로 고취된 개인적 독립에 대한 감정으로 인해 예술적 삶은 투쟁과 자기 확신으로 긴장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운동은 예술가들의 반항적 태도에 강력한 유산을 남겼고 반면에 신중한 중산계층은 진취적인 화가들을 비도덕적이고 쓸모없는 탕아들이라고 혹평했다.

특권 계급이던 아카데미 미술가들이 국가의 그림 구입을 결정하고 새로운 형식들을 관전에서 배척하자 젊고 독자적인 화가들 사이에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소외자 집단들은 미술 관료들에게 대항한다는 공동 이해로 뭉쳤다. 그들의 미술이 비록 테마에 있어서는 비정치적이었다 하더라도 그들 대부분은 사상적으로 무정부적이었으며 막연하나마 급진적이었다.

1869년 이러한 대립이 몹시 격렬해지자 12년 전에는 힘으로 공화국을 제압했지만 당시에 비등하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루이 나폴레옹은 관전의 심사에서 거부된 작품들의 특별 전시를 어쩔 수 없이 인가하게 되었다.

세잔느는 바로 이 낙선전 Salon des Refusés에 출품한 화가였다. 그는 미술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사실주의에 관한 투쟁 직후인 1861년에 파리로 왔다. 애당초 그는 사실주의자로 자처했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이 사실주의적인 접근방식과 일치하는 바는 거의 없었다.

부르주아인 엄격한 부친과 갈등하고 충족되지 않는 연애의 꿈으로 초조해 하는 청년이던 그는 파리의 진보된 예술 환경이 제공하는 자유스런 생활과 권위에 대한 반항에 매료되었다.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애초에 민주주의적 이상과 연계되어 있었다. 대중에게는 그의 작품 <돌 깨는 사람들>(그림 1)과 <오르낭의 매장>(그림 2)이 1848년의 급진주의에서 연장된 것으로 비쳤다. ‘리얼리티’를 그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하층계급을 그린다는 것을 뜻했고 다분히 당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직접적인 경험이 상상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전통적 신념에 대한 비판도 함축하고 있었다.

▲ (그림 1) 돌 깨는 사람들_귀스타브 쿠르베. 1849년. 159X259cm. 독일 드레스덴국립미술관
▲ (그림 2) 오르낭의 매장_귀스타브 쿠르베. 1849-185년. 315X668cm. 파리 오르세미술관

그러나 1860년 경, 사실주의 옹호론이 현대미술은 오로지 동시대적인 일상세계에만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초기의 정치적 시사성을 상당히 상실하게 되었다.

사실주의는 하층계급 생활의 리얼리티보다 기질과 색조에, 진지하게 관찰된 자연의 매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새로운 경험, 운동, 자기 확신으로서의 현대성에 관한 일반적 관념이 1848년의 사회적 인식을 대체시켜 버린 것이다.

사실주의가 낭만주의적인 파토스의 장면을 없애버렸다면 마네를 비롯한 젊은 인상주의자들은 연희자, 구경거리, 여행, 휴일의 쾌락 따위의 새로운 주제에서 낭만주의적인 색채와 감성을 유지했다.

<단테의 배>(그림 3)와 <메두사의 뗏목>(그림 4) 대신 그들은 세느 강의 뱃놀이를 그렸다. 1850년대와 60년대에 일어난 괄목할 만한 변화는 인간의 극적인 행위를 그리는 것으로부터 풍경 및 인간 환경 속의 평범한 동작을 그리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 (그림 3) 단테의 배_외젠 들라크루아. 1822년. 189X246cm. 파리 루브르박물관
▲ (그림 4) 메두사의 뗏목_테오도르 제리코. 1819년. 491X716cm, 파리 루브르박물관

따라서 처음에는 전체 사회를 재현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던 사실주의자가 순전히 서정적인 미술로 변해 버렸다. 쿠르베 자신도 그가 재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색에 대한 그의 감각에 의거해 자연에 따라 그린다고 말하게 되었다. 이처럼 묘한 소박성이야말로 주로 그의 색조 때문에 쿠르베를 찬양했던 1860년대 미술가들의 이상이었다.

마네로 대표되는 ‘순수회화’라는 실천 개념은 바로 이 시기에 생겨난 것이었다. 순수회화란 재현된 대상들에 관한 사상이나 감정의 개입 없이 직접 색조들의 구조로 파악되는 완벽한 세계, 즉 가시적인 것에 대해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대상들은 보여지긴 해도 해석되지는 않는다.

젊은 세잔느는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프랑스 회화에 대해 독창적으로 반응했다. 그에게 있어 ‘리얼리티’란 졸라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사춘기 시절의 쓸데없는 고민과는 반대되는, 삶에 대한 당당한 경험을 뜻했다.

그렇지만 예술가로 출세한다는 것 자체가 불확실한 꿈이었고,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세잔느의 부족한 자신감을 해결해주기는커녕 새로운 고민의 원천이 되었다. 그가 쿠르베와 마네의 직접적인 접근법을 따랐으면서도 그들의 미술에 전적으로 동화될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 있어 회화란 정서의 해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네의 냉철한 대가적인 정신을 갖지 못했고 젊은 인상주의자들처럼 자연을 정교하고 비정서적으로 향수할 수도 없었다. 그의 붓질들은 캔버스에 대한 공격이었는데 간혹 그는 절망감에서 캔버스를 부숴버리기도 했고 얼마 동안은 팔레트, 나이프를 주 도구로 쓰기도 했다.

자신의 암울한 기분을 나타내기 위해, 그는 빛과 짙은 음영의 극적 대비를 보여주는 과거 스페인과 이탈리아 화가들의 사실적인 바로크 회화와 프랑스 낭만주의의 전통에서 적합한 모델들을 찾아냈다.

비록 몇몇 신화적인 테마들을 그리긴 했지만, 과거의 이상적인 일화들을 재현하거나 동시대에서는 단지 외딴 장면이나 커다란 사건들만을 수용한 낭만주의적 상상을 세잔느의 상상력으로 오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잔느는 차용하여 이상화시킨 이미지에 대한 낡아빠진 취향에 반발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열정적인 그림들을 사실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

들라크루아 역시 격렬하고 절망적인 장면들을 상상했지만 그의 해석으로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은 인물들은 머나먼 시간 혹은 장소에 있었다.

세잔느의 회화는 보다 직접적인 자기표현의 수단이며, 현대식 옷을 입은 인물들로 일상생활에서의 폭력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격렬함이 그와 가장 절친했던 친구 졸라의 초기 작품의 특색을 이루고 있는데 그의 소설들은 격정적인 어조로 살인, 자살, 공포, 환각 따위의 극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졸라는 정확하고 냉정한 리얼리즘이 자신의 목표라고 공언할 때조차 섬뜩한 이미지를 사용하곤 한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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