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절규」 유채, 1893년 91/73.5㎝
뭉크 「절규」 유채, 1893년 91/73.5㎝

 

청기사파

'청기사파'는 '다리파'와 함께 20세기 초에 활약한 독일 표현주의 회화의 유파로서, 1911년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를 중심으로 전개된 화파이다.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색채의 강조와 형태의 과장을 강조한 '청기사파'는 1909년 뮌헨에서 결성된 '신예술가동맹'에서 분열 발전하여 1911년 말 뮌헨에서 제1회전을 개최하면서 탄생하였다. 청기사파의 첫 전시회는 1911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뮌헨의 탄호이저 현대 미술관에서 열렸는데, 이 전시회에 참가한 다른 미술가로는 앙드레 드랭, 장 아르프,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모리스 블라맹크 등의 야수파 화가들과 입체파 화가등이 포함되었다.

서구 물질문명의 한계를 초월하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세계를 지향하여 미술의 초월성과 초자연성을 추구하였던 미술사조였던 '청기사파'는 반서구적 전통과 원시미술에 주목하였다. 이를 통해 서구 전통에서 푸대접받던 원시적인 미술에 주목하고 미술을 통해 보편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를 경험하고자 하였다.

칸딘스키와 마르크가 1912년에 공동 편집한 잡지 <청기사>에서 유래된 명칭의 '청기사파'는 시작 초기에 이미 범유럽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으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마케와 마르크의 연이은 죽음에 따라 자연 해산되었다.

'청기사파'는 운동이나 유파가 아니라 뚜렷한 프로그램이 없이 다만 1911~1914년에 걸쳐 작품을 함께 전시했던 많은 미술가들의 포괄적인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청기사파'의 미술가들은 이보다 일찍 생겨난 독일의 미술가 집단인 '다리파'와 마찬가지로 표현주의적 성향을 띠었지만, '다리파'와는 달리 서정적 추상의 형태를 띠었으며 다양한 양식적 특징을 보였다. 그들은 깊은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의 신비감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인상주의 화가와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내적 흥분을 표현했고, 직접적이고 자발적으로 '통렬하게 느끼고' 해석된 소재를 전달했다. 결국 상징적 의미를 중시하는 색채의 사용과 정신적, 낭만적 심상을 형상화하려는 '청기사파'의 경향은 점차 추상화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칸딘스키의 정신성, 마르크의 종교성에서 비롯된 이 시기 표현주의적 추상회화는 현대미술사에서 최초의 추상화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들이 지향한 종합예술적 이념은 1919년 바우하우스(Bauhaus)로 이어졌으며, 격렬한 표현성은 195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서 극한까지 추구된 추상 형식의 모태가 된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크다.

표현주의 미술작가와 작품

표현주의의 대표작가들로는 현대표현주의의 선구자인 뭉크를 중심으로 '넨 분리파' 의 코코슈카와 에곤 쉴레, 그리고 독일 표현주의의 '다리파'의 키르히너와 놀데, '청기사파'를 대표하는 칸딘스키와 마르케 등의 작가들을 살펴볼 수 있다. 절망과 불안의 삶을 산 화가였던 뭉크는 작품 속에 이러한 자신의 불행을 반영하여 인생의 어두운 면을 형상화하였다.

분리파 작가들로서 코코슈카는 환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밝고 불안정한 텍스처와 두터운 임파스토와 꿈틀거리는 붓질을 사용하여 표현하였으며, 클림트는 특유의 에로티시즘적 표현주의를 열어 보이고 있다. 또한 에곤 쉴레는 극도로 왜곡되어 있는 누드를 강하게 표현하였다. 한편 독일 표현주의로 묶여지는 '다리파'와 '청기사파'는 각기 독창적인 방식으로 불안정한 사회와 개인의 내면의 표현 을 통해 독일 표현주의 회화를 선보였다.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현대 표현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뭉크는 노르웨이가 낳 은 세계적인 작가로 그의 작품 「사춘기」, 「절규」 등을 통해 노스탤지어와 공포, 절망으로 가득 찬 내면세계를 표현하였다.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영혼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면세계는 독창성있는 작품세계를 통하여 독일 표현주의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뭉크는 노르웨이의 전형적인 상류층 가정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상성격 소유자의 아버지와 어린 시절 일찍 어머니를 잃고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자신 역시 허약하였던 그는 14세 때 여동생 또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후 피해망상과 강박관념으로 고통받던 그는 정신분열증세를 앓았다. 이러한 그의 절망과 불행한 삶은 초기 작품 「병든 아이」에서 볼 수 있듯이 삶과 죽음의 응시를 통해 반영되었는데, 이러한 주제적 특징은 이후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다.

1890년 이래 일본 목판화와 후기인상파 작품에 영향을 받았던 뭉크는, 1892년 가을, 베를린 미술협회전에서 물의를 일으켰던 과도하게 강렬한 작품들을 제작하며 독자적인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립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애수 어린 서정적 성격을 더욱 내면화하고, 생(生)과 사(死),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를 거친 원색으로 표현한 강렬한 표현주의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후 독일과 파리에서 활동하였으며, 1908년 이래 2년 동안 고향에서 신경병으로 요양한 후 밝아진 색채와 문학적, 심리적인 정감을 보여 주는 작품을 선보였다. 1937년 나치에 의해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로 몰수당하였던 그는 이후 만년에는 은둔생활로 보낸다.

한편 1894년부터 몰두했던 판화에서도 두드러졌으며, 표현파의 선구자이자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국민 화가로 높이 추앙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생명의 프리즈」, 「절규」, 「별이 있는 밤」, 「죽음의 방」 등이 있다. 

 절규 (The Scream)

뭉크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인 작품은 대담하게 사선으로 구획된 원근법적인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화면에 전반적으로 드리워진 강렬한 색채의 대비는 울려퍼져 나가는 소리를 연상시키는 율동적 곡선의 흐름과 연결되어 다이내믹한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정면 인물이 취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있는 자세에서 절규하고 있는 느낌이 전해지지만, 오히려 유기체적인 유연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인 물을 둘러싸고 있는 이어진 배경의 곡선들이 더욱 유동적인 소리의 메아리를 증폭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구부러진 곡선들의 파동들과 사선으로 그러진 직선의 대비효과는 아르누보의 장식의 한 형태이며, 붉은 구름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일몰의 빛을 공포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고 있는 [절규]는 격렬한 색채, 터치의 소용돌이, 극적인 원근들은 절망적으로 일그러진 인물의 내면적 투쟁을 강조하고 있다. 뭉크의 작품에서는 항시 사랑, 죽음, 불안 등이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신 분열적 두려움에 대한 자신의 고백을 담아내고있다.                                                                                                                                                                    "어느 날 저녁에 해가 막 서산 너머로 지고 구름은 붉게 물들어 있는 무렵, 나는 시내와 바다 사이에 연결된 다리 위에서 난 피곤했고 몹시 지쳐 있었다. 그때 나는 자연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은 것 같아 이 그림을 그렸다. 진짜 피처럼 구름을 그린 것이다. 그 색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면서 뭉크는 자신의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출처:현대미술의 이해 홍창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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