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대학원 미학과를 다니다가 중도에 나와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어렸을때의 꿈이 오로지 화가였던 필자는 대학교 3학년 전공과목 미학을 공부하면서부터 새로운 꿈이 다시 생겼다. 미학을 조금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현대 미술의 역사를 바꾸었던 것은 일본인 아내의 영향으로 동양철학과 미학을 공부하면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탄생했다. 

마르쉘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은 변기의 일부분을 미술관에 전시함으로써 회화를 평면적인 예술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관념을 깨트리는 그야말로 기이하고 파괴적인 예술의 시초가 됐다. 더 나아가 백남준은 이제 아예  예술은 입체적이며 미디어와 함께 내가 보이는 대상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비디오 아트가 탄생케 된다.

그 사상의 기초는 동양미학이었다. 일반대학과 달리 미술대학은 3학점이라면 전공과목 6시간, 3시간, 3시간씩 실기 시간이 배정되고 교수님도 다르기 때문에 거의 밤낮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고된(?) 시간이 3학년부터 시작된다. 밤을 새어 그려도 수업을 따라 가기 힘들었던 시절. 마치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수업시간을 채우기 위해 습관적으로 그림 그리는 쟁이가 되는 느낌. 그렇게 회의가 들던  3학년때 미학은 내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이런 나의 상황을 아는 교수님께서 그러면 미학을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해 미술평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어떠냐?는 조언으로 무기력했던  나를 새롭게 깨웠다.  그림과 유학 준비로 새벽 4시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틈나는 데로 그림 그리고 ..정말 치열하게 생활했던 기억. 그러나 .. 유학은 가지 못하고 결국 나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그렇다고 숨어 살수는 없어 그래도 글을 쓰는 건 자신이 있었기에 처음 시작된 사회생활이 치과계 기자였다.

그러던 중  故 이영규 회장을 인터뷰하는 기회가 생겼다. 이영규 회장님의 집무실은 신흥 14층 건물에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소박했던 이영규 회장님. 하지만 그 당시 사회초년생이었던 기자에게 이영규 회장님은 너무나 큰 분이셨다.  10년 후면 치과계 도매상도 없어 질 것이며 택배사업이 활성화되어 온라인 사업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적중했다.

틈틈이 여행을 다니신다는 회장님은 낡은 여행용 버너와 용품들을 보여주시면서 최대한 비용을 아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보고 오신다는 말씀. 그리고 처음 일본에 갔을 때 국내 치과계의 미래를 내다 보시고 신흥 치과상사를 설립하게 되셨다는.. 초보기자에게 알려줬던 메시지가 어쩌면 기자를 치과계에 첫 직장이자 지금도 일하게 하는 이유가 됐으리라.

10년 후를 미리 예견하셨던 이영규 회장님과의 인터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기자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는 분. 이영규 회장의 일생을 통해 기자는 이를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이자 현재를 다시 보고 미래까지 기대되는 치과계였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이제 이영규 회장님의 모습은 뵐 수 없지만 그 때 회장님과 인터뷰를 하고 돌아 섰을 때 이 훌륭하신 분의 말씀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까 가슴 벅차기도 하고 .. 걱정이 앞섰던 가슴 떨린 그날의 기억.

그 분의 선견지명과 치과계에 대한 애착은 지금도 기자의 가슴을 여미게 만든다. 그것이 기자로서 사명감을 느끼게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고인이 일구어낸  위대한 발자취는 치과계에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 올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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