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와 히포크라테스 선서

고요한 원장은 글쓰는 치과의사로 저서로는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있다. 
고요한 원장은 글쓰는 치과의사로 저서로는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있다. 

몇 개 도시에 병원을 정해두고 순회진료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로 뛰어들었던 처음에는 뭐 일이랄 게 없어, 불러주는 데만 있으면 언제 어디든 달려갔다. 없을 땐 한 달 가까이 놀기도 했다. 그렇게 들쭉날쭉하던 출장이 몇 년을 거듭하다 보니 일이 계속 붙었다.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고 거의 일정해졌다. 

그들에게 나는 기본적으로 치과 임플란트라는 대한민국의 의술을 제공한다. 덤으로 다른 지역의 다른 병원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뭐하며 사는지에 대한 세상 소식도 전해준다. 기술 보부상이 전서구(傳書鳩) 역할까지 겸한다고 할까? 반면에 그들은 내가 오는 날에 맞춰 외국인 전문가에게 진료받기 원하는 환자를 모아둔다.

보통 한 달에 한두 번 꼴이다. 일단 이렇게 서로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공생관계가 형성되면, 별다른 일 없는 한 그냥 이대로 쭈욱 간다. 딱히 계약이랄 것도 없다. 계약과 관련해서도 중국에서 많은 일이 있었는데, 두 개의 에피소드가 인상 깊게 남아있다.

앞서 「베이징」 편에서 언급했던 H 중한 합작 의료기업과 고용계약을 맺을 때 일이다. 당시 H에는 한국 성형외과 의사가 여럿 있었지만, 따로 표준계약서라고는 없었다. 한중 간을 오가며 이미 구두로 근무조건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점이라, H 소속의 통역 베이베이(贝贝)를 통해 한글 계약서를 중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몇 번의 수정이 가해진 후 한글과 중문의 최종본에 사인까지 완료했다. 그러고 1년이 지나던 시점이었는데, H는 갑자기 계약대로 하겠다는 통보와 함께 내 급여를 절반 가까이 깎아버리는 게 아닌가.

당시 통번역을 맡았던 베이베이는 이미 H를 떠난 몸이었지만, 답답한 나머지 나는 그녀를 불러들여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녀는 자신의 번역 실력이 무시당하는 듯해 언짢아하긴 했지만, 금세 냉정을 되찾아 계약내용을 살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1년 전 자신이 번역한 중문 본과 지금 보는 계약서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때 몇 번이고 대조하는 과정을 거쳤기에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면서. 게다가 한글본과 중문 본의 내용이 다를 시에는 중문 본을 따른다는, 나는커녕 그녀조차 모르는 독소조항까지 들어있는 게 아닌가. 중국인인 베이베이 자신이 봐도 이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했다. 1년 전 그날 나와 H 간에 오가던 계약서를

서명하기 직전 누군가가 바꿔치기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이 안 된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다른 한 번은 치과기업 S와 계약할 때다. 그들과는 내가 제시한 조건으로 이미 1년 가까이 함께 일해오던 터라 계약서를 쓰는 데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S에서는 지난(济南, 제남)의 관리자인 황종(黄总, 황 사장)이 조율자로 나섰다. 그는 나와 같이 일해오며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는 내가 고수하는 조건과 S 본사의 외국인 전문가 표준 조건 사이의 괴리에서 몇 달째 난처해하는 모습이다.

보다 못한 나는 신뢰할 사람 하나 없는 S 내에서, 솔직히 말하면 중국 내에서, 그나마 가장 믿음이 가는 중국인인 황종에게 “팅니 더(听你的,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요)” 하며 백지계약서를 일임해버렸다. 얼마 안 가 황종은 회사의 조건보다 오히려 내게 유리한 계약서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감동이었다.

게다가 그는 후에 영전해서 간 광저우(广州, 광주)와 시안(西安, 서안)의 대형 치과병원에까지 나를 초빙했다. 그것도 더 나은 조건으로 말이다. 이후로 황종과는 중국을 떠날 때까지 친구관계로 지냈다. 그의 입김 탓이었는지 아니면 고요한의 가치가 그 정도는 된다고 판단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S는 그가 치과를 떠나 원래 몸담았던 산부인과로 복귀한 후로도 꾸준히 나와의 계약관계를 유지했다.

프리랜서 초창기 시절부터 매달 만나온 병원 사람들은 한 직장의 동료나 다름없다. 서로 손발이 맞아 편해지고 정도 많이 쌓인 것이다. 그들 가운데 처음부터 가장 오랜 기간 나를 도와 수술에 참여한 치과의사가 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라오장은 ‘까오웬장(高院长, 고 원장)이 자신의 임플란트 라오스(老师, 스승)’라며 깍듯이 떠받든다. 중국에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을 부르거나 스스로를 낮출 때 성(姓) 앞에 샤오(小)를 붙이고, 나이가 많거나 윗사람이면 라오(老)를 붙인다. 그는 나보다 한참 손아래지만, 나는 그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라오장(老姜)이라 부른다. 

여담인데 호칭과 관련해 병원 측은 한술 더 뜬다. 나를 ‘임플란트의 아버지(老爸)’ 또는 ‘임플란트의 신(神)’이라고까지 선전해댄다. 광고를 보고 처음엔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나 자신도 낯이 뜨거웠다. 무슨 음악의 아버지 바흐도 아니고, 두선(赌神, 도박의 신)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한국에서 이미 보편화된 술식이 중국에선 선진 의술이고 아직 먹힌다는 얘기다. 라오장은 제자이기에 앞서 무엇보다 사람이 착하고 성실해 특별히 더 마음이 간다.

여느 달과 같이 길 위에 있었다. 집을 나선 지 며칠이 안 돼 갑자기 사랑니가 아파왔다. 잇몸이 부어 음식을 씹기가 힘들다. 치과의사가 이가 아파 밥을 못 먹는다. 내 자가진단으로는 아픈 사랑니를 가능한 한 빨리 뽑아야 하는 상황이다. 제3대구치는 주로 10대 말부터 20대 초반 사이에 나는데, 그때가 한창 사랑할 나이라 사랑니라 부른다. ‘왜 쉰이 넘은 지금에야 나와서 애를 먹이는 거지? 사랑할 나이도 한참 지났는데. 내가 이제야 겨우 사랑을 알아가고 있다는 뜻인가?

지금 사랑하란 말인가?’ 입 맨 안쪽에서 마지막에 나는 치아라 ‘막니’라고도 부른다. 영어로는 wisdom tooth다. 그 나이 때가 지식을 많이 쌓는 시기라서 그렇게 이름하였다고 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지치(智齒)이고, 중국어도 같은 단어(즈츠, 智齿)를 쓴다. ‘그래, 늦었지만 어서 지혜로워지자!’ 
이 달에도 여섯 개 도시를 순회하며 진료를 해야 하는데, 마음에 둔 라오장이 일하는 곳은 일정이 월말에 배정되어 있다. 앞서 황종이 있었던 지난(济南) S치과다. 아직 갈 길이 먼데 고민이다. 현지의 의사들한테 부탁해서 발치를 할지, 아니면 그를 만나는 월말까지 기다릴지. 사랑니의 부기에 따라 나는 갈등에 휩싸였다 풀려 나오기를 반복했다. 

사랑니가 급성으로 붓고 아프면 여기서 바로 뽑아야지 생각했다가, 만성염증 상태로 넘어가 좀 살 만하면 월말까지 기다리지 뭐,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요동을 쳤다. 며칠을 고생하고야 나는 유동식으로 버티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러면서 차츰 참고 기다려 라오장에게 부탁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져 갔다. 그러는 동안 치통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 믿고 맡길 치과의사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 그리고 현지에 한국병원이 없어 답답한 교민들의 애환을 직접 느껴볼 수 있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의미를 맛본, 아파서 고마운 시간이었다.
 
드디어 월말이 왔고 라오장을 만났다. 내가 사랑니 발치를 부탁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응한다. 언제부터 아팠는데 어디서 누구에게 발치받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던 부분, 갈등 끝에 라오장에게 부탁하기로 결정하는 과정, 죽과 유동식으로 월말까지 참고 견딘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통역인 샤오인이 나를 대신해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이르자 그는 살짝 감동하는 눈치다. 말까지 더듬으며, 스승인 나에게 보답할 기회를 주어 오히려 자기가 감사하다고 한다. 
돈키호테의 애마 로시난테의 표정처럼 콧구멍 평수가 한껏 넓어진 그의 순박한 얼굴에서 우쭐하는 기운마저 묻어났다. 

치과용 진료의자에 누웠다. 치과치료에 있어서 만큼 나는 항상 1인칭이었는데! 나라는 존재가 주어에서 목적어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술자로서 위에서 내려다보며 가늠했던 불안감은 실제 환자가 되어 누워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그간 환자들에게 긴장하지 마시라고 수도 없이 한 얘기는 다 실없는 위로였다. 밑에서 받는 느낌은 초조와 긴장을 넘어 공포 그 자체다.

라오장은 발치의 달인들로 알려진 구강외과 출신 치과의사다. 사랑니를 진짜 단 1초 만에 뽑아낸다. 결국 빠져나간 앓던 사랑니가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경직됐던 나의 골격근들이 눈 녹듯 사르르 풀려 내린다. 비로소 가슴 두근거림도 잦아든다. 

환자는 비용을 지불하고 의료라는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다. 마땅히 의사는 진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이다. 하지만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그런 일반적인 경제학의 개념을 따르지 않다. 환자는 의사에게 떵떵거리지 못하고, 늘 고양이 앞에 쥐처럼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다. 통념상으론 분명 갑인데 오히려 을에 가까워, 고객이 왕이라는 상거래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믿건 못 믿건 간에 의사에게 자신의 신체와 영혼 일부를 담보로 내놓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믿는다손 치더라도 불안감만은 절대 떨칠 수 없는 입장인데 말이다. 특히 치과환자는 각종 수동 및 전동 흉기들로 가득한 대장간에 누워 대장장이에게 순순히 자신의 머리를 내놓아야 한다.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입을 벌린 채 다소곳이 말이다. 의사의 숙련도와 양심을 믿지 못한다면, 고문에 가까운 고통스러운 시간임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지나며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들과 접하게 되었다. 세계 각국의 의료 수준, 의료전달체계, 방역시스템, 의료기관 및 전문가 단체와 정부 간의 소통 및 협업 능력, 그리고 국민들의 사회적 성숙도 등등을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게 되었다. 팬데믹 초기에 방역 부문에서는 ‘K방역’이라고 해서 대한민국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우리의 시민의식은 지구별 최고 수준이었다. 

코로나19가 초기 대구에서 창궐했을 무렵 외신기자들은 의아해했다고 한다. 보통 이 정도면 사재기는 기본이고, 소요나 폭동마저 일어날 법한데, 대구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다. G7이라고 으스대는 미국과 일본 등의 나라에서도 벌써부터 이런 추태가 벌어졌기에 더더욱 궁금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자들이 실제 현장에내려가 만난 대구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대구시민들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유지한 채 약국이나 마트, 그리고 선별 진료소 앞의 끝도 보이지 않는 줄에 서서, 질서 있게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노약자나 급한 이웃들에게 쉽게 양보도 해주더라는 것이다. 기자들이 그 광경을 목도하고는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 극빈국이었던 남한이 지금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데 대해 세계는 하나같이 놀라는 반응이다. 우리의 발전 속도에 관해서는 경이적이라 하고 혹자는 기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중국도 심상치 않다.

중국은 한국보다 빠른 속도로 선진국에 진입한 유일한 국가다. 빠른 경제성장만큼이나 중국 인민들의 건강과 미용 그리고 복지에 대한 욕구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그렇다 한들 그 수요의 증가속도에 맞춰 의료서비스가 제때 따라주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괜찮은 의료기관과 우수한 의료 인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요와 공급의 격차가 크다 보니 당분간은 중국 내에서 의료 제공자 측이 절대 갑이다. 특히 국공립병원의 의사들은 콧대가 하늘을 찌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 유명한 의사에게는 진료 한번 받으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도 홍빠오(红包)라는 뇌물을 줘야만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고, 급행료를 찔러주더라도 몇 달씩 기다리는 건 예사다.

중국 인민들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눈높이는 높아가는데 의료 인프라가 이 모양이니, 환자들의 불만은 쌓이고 쌓여 분규로 이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얼마 전 베이징의 한 블로거가 본인의 사이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자신의 성형수술 체험담을 소개하는 일이 있었다. 그녀는 그 계통의 파워블로거였기에 많은 네티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병원 측으로써도 잘만 되면 광고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는 기회여서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러는 동안 수술 전후의 사진들을 비롯해 환자로서의 소감, 의사와 병원의 서비스와 태도 등에 대한 전 과정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불행히도 그녀는 수술을 받고 며칠 후에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사건은 인터넷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이곳은 우징이웬(무경병원, 武警医院)으로 국립병원이다. 우징은 무장경찰로, 한국으로 치면 경찰특공대쯤 된다. 우징이웬은 일반인도 진료를 받을 수 있기는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경찰과 경찰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목적의 공립 의료기관이다. 성형외과가 있긴 있으되 병원의 성격상 미용성형보다는 흉터나 결손을 수복하는 재건수술 위주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하지만 요즘 미용이 돈 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병원도 알고 민간도 아는 사실인지라 유명 국공립병원의 성형외과와 치과는 누구나가 눈독을 들이는 자리다. 중국 의료계에서도 발 빠른 장사치들로 소문난 푸젠(복건, 福建) 사람들이 손 놓고 가만있을 리 없다. 수의계약을 통해 벌써부터 우징이웬 성형외과 부문의 운영권을 손에 넣은 것이다. 병원으로써는 적자를 면치 못하는 과가 수혈 없이 자체적으로 돌아가고, 명성도 드높인다. 외주 운영자 또한 돈을 벌어가는 구조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모델이니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같지만, 사실 중국 내에서 이런 일은 부지기수다. 그들 말로 재수 없이 사건화 되어 터졌을 뿐이다. 국립병원이 마땅히 가야 할 봉사와 헌신의 길은 멀리하고, 이렇게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민심은 들끓었다. 더욱이 이들 민관이 어깨동무해서 벌인 추잡한 뒷거래들까지 인터넷 상에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그들을 비난하는 여론은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진다. 급기야 사건은 피해자의 유족에 네티즌들까지 합세한 폭력사태로 치닫게 된다. 

내가 알기로 중국은 유연한 나라다. 중국에는 ‘문제 되지 않으면 문제 삼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덩샤오핑(등소평, 邓小平)이 개방을 하고 중국은 짧은 기간 안에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를 기초하는 경제적인 법제들은 아직 민생을 커버할 만큼 성숙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법에 없는 거는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대신 조용히 해 먹고 표 안 나게 깨끗이 치우라는 뜻일 것이었다. 

원만한 해결을 기대하며 예의 주시하던 중국 정부는 사태가 그럴 단계를 넘어섰다는 판단이 서자 직접 수습에 나섰다. 더 두었다가는 자칫 중국 정부와 공산당의 위상에까지 흠집이 나겠다는 우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베이징 시정부는 우징이웬에 벌금과 함께 성형외과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외주회사에는 퇴출 및 폐업을 명령했다. 또한 중앙정부는 전국의 국공립 병원에 대해 일절 외주 운영을 금하는 긴급 법령을을 발표하는 등 발 빠른 모습까지 보였다.


H를 나오기 전후로 알고 지낸 분이 있다. ‘비서장님’이란 이름으로 통하는 한국인이다. 정식 호칭이 ‘중화인민공화국 장수성 난징 시정부 한국투자기업협회 비서장’이라 그런지 듣기에 사뭇 공산당의 냄새를 풍긴다. 다른 지역으로 치면 한인상공회의 회장쯤 되는 지위다. 

멀쩡히 잘 다니는 걸로 알았던 내가 H를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듣고 비서장님은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냥 나왔다고만 했는데, 대번에 “한국인들끼리 좀 잘 지내지!” 하며 화를 버럭 낸다. 늦게 합류한 고 원장을 돕지는 못할망정 얼마나 못살게 굴었으면, 하고 기존의 한국의사들을 싸잡아 비난한 말이다. 병원 내에 몇 안 되는 한국인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음을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다.

눈치가 백 단이다. 하기야 교민들끼리 혹은 우리 교민과 중국인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사고들을 최전방에서 지켜보고, 그 내막을 누구보다 잘 알 당사자가 다름 아닌 그일 테니 말이다. 
하루는 비서장님이 중국인 친구 한 사람을 데려왔다. H를 나오며 호기롭게 프리랜서를 선언하긴 했지만, 일이 없어 놀다시피 할 때다.

60대 남성인데 임플란트 수술을 받으려는 환자였다. 임플란트 개수도 10개나 되는 중환이다. 우리는 요즘 한창 유명세를 타는 집밥 백 선생의 원조 한식당 ‘본가(本家)’에서 만났다. 비서장님은 통역도 없이 짧은 중국어로 서로를 소개하고, 밥까지 사주셨다.

환자의 말로는 요즘 광고를 많이 하는 쥔취이웬(军区医院, 군구 병원)에서 한국의사에게 상담을 받아봤는데, 믿음이 안 가더라는 것이다. ‘음, 군 병원 치과의 운영자와 한국치과의사는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인데.’ 병원은 어디가 돼도 좋으니, 비서장의 친구인 까오웬장(高院长, 고 원장)이 직접 수술을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곧바로 적당한 치과의 물색에 나섰다. 갓 병원문을 박차고 나온 처지인 나로서는 그 도시 난징(남경, 南京)에서 장소를 제공해줄 만한 치과를 찾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웬만한 민영병원과 국공립병원의 노른자위 과는 H의 오너와 동향(同鄕)인 푸젠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도 걸림돌이었다. 몇 날을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보통 나는 수술만 하지만, 특별히 비서장님 친구이니 1차 수술부터 보철치료까지 책임지고 다 해드린다.

장소는 말씀하신 쥔취이웬 치과가 될 것이고, 임시 틀니 제작과 드레싱이나 실밥 푸는 따위의 간단한 진료는 군 치의관에게 부탁한다’는 거였다. 환자도 흔쾌히 수락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나는 쥔취로부터 진료비 인센티브도 챙길 수 있었다. 

수술은 별 탈 없이 진행됐다. 환자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잊고 지냈는데, 얼마 후 쥔취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2차 수술을 하다가 그만 임플란트 1개가 빠졌다고 한다. 고 원장이 다시 심어주던지, 아니면 그만큼의 인센티브를 토해내라는 것이다.
‘아니!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할 일인데! 왜 벌써 함부로 건드렸단 말인가! 심은 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안 됐을 텐데! 수술 보고서에 분명 2차 수술 시기를 명시해두었는데. 뼈 이식과 동시에 상악동을 거상했기에 2차 수술까지는 아직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왜 내가 할 일을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저희들 마음대로 해버렸다는 것인가? 환자로부터 나 몰래 나머지 보철 진료비를 받아내는 게 그토록 급하더란 말인가?’

쥔취이웬 치과의 운영 역시 깍쟁이 푸젠사람들이 맡고 있었던 터라 나는 절로 몸서리쳐졌다. 심장은 한동안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가라앉기를 멈추지를 않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환자와 비서장님에 대한 송구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런 와중에 베이징 우징이웬의 사망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렇다! 쥔취 측은 우징의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베이징의 후속조치로 결국 쥔취이웬의 치과도 문을 닫게 된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버린 환자에게 나는 샤오인을 통해 ‘어떠한 수단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진료를 마무리해드리겠다’ 하고는 일단 안심을 시켰다. 그러고는 난징의 또 다른 병원들을 거듭 물색한 끝에 겨우겨우 쓸만한 치과 한 곳을 찾아냈다. 샤오인을 통해 다시 환자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녀 말에 의하면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이후로도 그와는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근래 한국에도 의료분쟁 문제를 다루는 뉴스와 기사 들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이를 다루는 시사 프로그램도 적지 않다. 안을 들여다보면 대개가 책임공방인데, 법적으로 의사의 과실 여부를 가려 한쪽은 책임을 면하려 하고, 다른 한쪽은 나중에라도 보상이나 배상을 받는 데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내용이다. 

의료계에서 의료진의 사과는 대체로 스스로의 과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향후 의료분쟁을 처리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근래 미국의 여러 연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의사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일 경우가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소송으로까지 갈 확률이 현저하게 낮아진다고 한다. 그리고 환자도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병원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는 공공기관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와 함께 이윤도 추구해야 한다. 병원은 공적인 영리기관, 말하자면 공기업인 셈이다. 이러한 성격상 의료기관은 국가가 주도로 설립과 운영을 책임지고, 민간이 그 틈새를 메워나가는 형식이 바람직하다. 북유럽 국가들이 복지와 사회보장 정책에서 자본주의에 사회주의를 접목하고 있는 형식이 좋은 예가 되겠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국가가 의료기관 및 의료인의 70%정도를 책임지고, 나머지를 민간의 자유시장에 맡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 동안 정부가 뒷짐을 져왔고, 의료공급의 90%를 민간에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받아주는 공적 의료기관이 없으니, 의료인 열에 아홉은 개원가로 내몰린다.

한국의 상업지역만큼 개인병원이 바글바글한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의사가 돈만 밝힌다’는 소리가 틀린 말도 아니지만, 비즈니스 개념이 없는 의사가 자기 개인 자본으로 만든 공기업, 즉 개인 클리닉의 개설부터 운영 및 진료에 이르기까지 행정적, 법률적, 경제적, 의료적 책임을 모조리 다 져야 하는 구조이니 비난만 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나는 의사치고 세속적인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한중 양국에 걸쳐 열 번에 가까운 개원을 해봤다. 머물며 진료해본 도시만 해도 40개에 달한다. 몇 번의 의료사고와 분쟁도 경험했다. 대한민국 치과의사가 중국 내에서 불법취업자로 몰려 구류도 살아봤다. 귀국 후에는 법원을 통해 파산과 면책의 절차도 밟았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가히 파란만장하다. 대부분이 자초한 것이긴 하지만, 의사로서는 겪지 않아도 될 일까지 경험한 셈이다. 

일천한 내 경험에 의하면, 병원을 운영함에 있어서의 대원칙은 의사는 환자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기관이라는 데가 원래 의사를 비롯한 의료인이 활약하는 곳이긴 하지만,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따라서 원주인인 환자에게 병원을 돌려줘야 한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게 바로 가는 길이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다다르게 되어있다. 반면에 환자를 수단으로 보면 얼마 못 간다. 목표에 빨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아니다. 결과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와 같다.  

의료라는 비즈니스가 여전히 의사에게 유리하고, 의사가 결국 이기게 되어있는 게임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의사가 환자의 입장에서 병원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되도록 되어있다. 아니! 되어있어야 한다. 윈-윈이요 백전불태(百战不殆)인 게임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의료기관의 본분은 도덕적인 길을 걸어 국민의 건강과 생명 보호라는 목표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안정적이고도 지속 가능한 목표에 다다르려면 환자우선이라는 명제는 반드시 따라야 할 진리인 것이다. 물론 의사와 병원 들이 이러한 사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우선이다. 정부와 보건당국이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의료계를 이기적인 집단이라 비난하고 밀어붙일 일이 아니라, 솔선해야 한다.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린다고 해서 진주나 안동의 의료원들을 폐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공의료를 확충해야 한다. 그게 먼저다.

굳이 적자가 이유라면 의료원이 아니라 건강보험공단을 손보는 게 맞다. 연일 되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방대해져 가는 건강보험공단의 규모를 좀 줄이면, 그 돈으로 서민을 위한 의료시설을 늘릴 수 있고 또 경영란에 허덕이는 착한 민간병원 몇 개는 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끝으로 여기에 히포크라테스 선서 전문(全文)을 실어본다. 의사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의사의 윤리에 관한 내용인데,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선언문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우리 의사 선생님들은 풋풋했던 의학도 시절의 각오와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기 바란다. 또한 의사와 병원을 선택해야 하는 환자들도 찬찬히 한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의사는 초심으로 돌아가고, 환자는 이런 의사를 고르면 된다. 틀림없다.

< 히포크라테스 선서>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내 위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 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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