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상 인상주의 역할은 상당하다. 인본주의를 모토로한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달 곧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초상화만을 그리는 직업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는 시초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린다의 인상을 그대로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인상주의의 출현은 화가의 시각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시초를 닦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세잔느의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게 되는 큰 흐름이 된다. 이에 본지는 세잔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이어 샤피로의 폴 세잔느를 인용하여 독자들의 미술세계를 넓히고자 한다. 읽어가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점점 더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림으로써 감성의 세계에도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이 그림과 더불어 세잔느의 중기와 후기의 일련의 위대한 정물화들이 시작된다.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이 작품은 공들은 윤곽선과 깊이 있는 그림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통으로의 복귀로 여겨진다.(그림 1)

(그림 1) 과일접시가 있는 정물. 세잔느. 1879-1880년 경. 55×46cm. 개인소장
(그림 1) 과일접시가 있는 정물. 세잔느. 1879-1880년 경. 55×46cm. 개인소장

 

또한 탁자보 위의 사과로부터 벽의 나뭇잎 무늬에 이르기까지 견실하게 대상들을 짝짓고 중심을 잡아 놓은 점에서 확실히 매우 형식적인 정물화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제 나름대로 짝지워진 색점들로 이루어진 색채에 의해 대상들 간의 균형이 엇갈리거나 중첩되어, 동일한 대상이 다른 집단에 소속된다. 이로써 서로 대립되는 축들은 그렇지 않았다면 정적으로 되어버렸을 전체에 신비스런 생명을 부여한다.
전경의 어두운 반점이 구도를 정착시키며 위의 수직적 요소들을 수평적인 토대에 결속시킨다.

색채는 대단히 감미롭고 비슷한 색조들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풍요롭다. 각 색채는 모든 대상들에서 각기 다른 명암의 다양한 변화를 보이며, 가시적 단계들 내에서 명도의 범위를 드러낸다. 색채가 투명한 색조로부터 멋진 밀도와 힘을 지닌 찬란한 색채로 미묘하게 옮겨감으로써 대기, 짙은 그림자 그리고 빛 속에서 나타나는 형태들이 견고해 보인다.

세잔느는 대상들의 질감에는 무관심한 채 보다 촉각적인 물감의 질감을 통해 불투명한 것, 투명한 것, 대기적인 것 그리고 벽지의 장식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자체가 회화적인 것의 평면성 등 물질성의 정도를 재창조한다.

세잔느는 공기와 빛이라는 이 불안정한 매체 속에 있는 형태들을 명확히 하기 위해 대상들 언저리에 어두운 선들을 그려 넣었다. 그의 다른 그림들에서보다 더 분명한 그림 속의 이 윤곽선들은 후대 미술가들이 여기서부터 끌어낸, 형태를 둘러싼 선들처럼 두껍고 단일하지는 않다.
이 정물화를 소유했고 열정적으로 찬양했던 고갱은 어느 초상화의 배경 속에 이 그림을 재현해 놓았는데, 거기서 그는 추상화된 장식적 선들의 양식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이 그림의 소묘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굽 달린 과일접시와 유리잔의 타원형이다. 세잔느는 과일의 위치, 색채, 윤곽선들을 다양하게 했듯이 그릇의 윤곽선도 매우 과감하게 처리했다.
굽 달린 과일접시의 타원형은 독특한 복합 형태인데, 아래쪽이 평평하고 위쪽이 더 둥글어서 원근법적 시각과 상반되며 유리잔의 대칭적 형태들과도 다르다. 이 굽 달린 과일접시의 타원은 그 비례상 캔버스의 사각형 분할에 접근하고 있으며, 그 곡선에 있어서는 사과들과 포도의 대비적 형태, 궤의 직선들, 아래쪽 과일의 곡선들 및 벽의 잎사귀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탁자보 위에 있는 여섯 개의 사과들 주위에 그려진 선은 굽 달린 과일접시의 개구부와 동일한 곡선이다. 만일 우리가 이 그림을 정확한 원근법적 형식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굽 달린 과일접시는 진부하게 보일 것이며 안전성과 남성적인 강건함의 적절한 효과를 잃게 될 것이다.

미묘하면서 강한 이 걸출한 그림은 미술관의 대작이 갖는 엄청난 기운을 띠고 있다.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려는 야심만만한 젊은 미술가에 의해 그려진 다른 대작들처럼, 이것도 다소 지나치게 세심하고 경직되어 있다. 작품의 착상, 그 기법과 고안은 세잔느의 후일의 미술에서보다 더 촉각적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철저한 진지함과 솔직성이 이 작품의 매력인 것이다.

 

 

<프로방스의 집>은 세잔느의 대표작의 하나로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시적으로 조화시킨 점에서 독창적이다. 집은 수직적이고 경사진 평면들에서 산과 유사하고, 산은 곳곳에서 날카롭게 잘려지고 번번하여 마치 인간의 구축물처럼 보인다.(그림 2)

(그림 2) 프로방스의 집. 세잔느. 1885~1886년. 78.5×65cm.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그림 2) 프로방스의 집. 세잔느. 1885~1886년. 78.5×65cm.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사람이 만든 것은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역사적인 사건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반면에 자연적인 것은 마모된 많은 흔적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것들에는 기하학적인 것에서 유기적인 것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불연속적인 선들로 이루어진 나무들의 둥근 형태들에서 정점을 이룬다.

직선 형태들은 가장 따뜻한 색채로 되어 있고 덜 규칙적인 산과 나무들은 차가운 색채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도치 수법으로서 시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은 평행적인 형태들은 물론 공통의 색조를 통해 서로 침투하고 있다. 미묘하게 부서진 집의 용마루는 수목의 파상선 속으로 연장된다.

집을 나머지 풍경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나무들의 구성은 매우 뛰어나다. 나무들은 대체로 대칭적인 형태이며, 멀리 무리를 이룬 나무들의 가장자리는 바로 위의 산에 나타난 틈이나 그림자들과 연관된다.
그 중 제일 오른쪽에 있는 가장 높은 나무는 마치 집의 일부인 양 굴뚝으로부터 솟아올라 있다. 그것은 화면의 중심 부근에서 집과 산을 통일시키는 축을 형성한다. 이 나무는 산 위의 가장 밝은 반점 바로 아래에 있는데, 이 반점은 또한 그 아래의 언덕, 오른쪽 아래의 가장 멀리 있는 나무, 집의 가장 왼쪽 박공선 등의 선들이 수렴하는 초점이기도 하다.

하나의 나무로 생각될 정도로 서로 겹쳐 있는 전경의 두 나무는 두 벽의 접합부를 가리고 있다. 이 과감한 수법은 집의 수평선을 강화하고 이 벽들이 가진 수렴의 강도를 약화시킨다. 그래서 이 벽들은 마치 180도에 가까운 각도에서 애매하게 합쳐지는 것 같다.
창문들과 문의 위치들은 세부 구도에 있어 세잔느의 위대한 면밀함과 섬세함을 보여주는 예이다. 나무가 한쪽 창문을 가리고 있는 방식, 문과 다른 쪽 창문이 굴뚝과 그 위의 나무와 더불어 미세한 경사선을 이루는 방식을 보라.

온전한 첫 번째 창문이 희미하게 그려지고 정상적으로 배열된 집의 다른 구멍들이 진하게 그려졌다고 상상해 본다면 그 임의성과 신중함 때문에 더욱 세잔느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특히 아름다운 것은 잎사귀가 없는 나무와 오른쪽에서 반복되는 그와 비슷한 형태인데, 이것은 이 영원하고 실체적인 풍경 속에서 비물질적이고 지속적인 요소이다. 수평선들은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것들이다.

이러한 작품의 숭고함에 도취된 비평가들이 세잔느가 보여준 자연의 ‘본질적’ 혹은 ‘근본적’ 형식들에 관해 언급할 때, 우리는 그런 견해 속에 함축된 자연철학을 거부할지는 몰라도 그 은유만은 존중한다. 즉 그 형태들은 실로 일상적 지각에서는 주어지지 않는, 또 질서에 대해 남달리 비상하게 민감한 정신을 요구하는 자연의 조화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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