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상 인상주의 역할은 상당하다. 인본주의를 모토로한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달 곧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초상화만을 그리는 직업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는 시초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린다의 인상을 그대로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인상주의의 출현은 화가의 시각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시초를 닦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세잔느의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미술에 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게 되는 큰 흐름이 된다.

이에 본지는 세잔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이어 샤피로의 폴 세잔느를 인용하여 독자들의 미술세계를 넓히고자 한다. 읽어가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점점 더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림으로써 감성의 세계에도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독창적인 기법으로 그려진 이 <앉아있는 빅토르 쇼케의 초상화>는 세잔느가 구축적인 형식을 추구함에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간 단계이다. (그림 1)

▲ 그림 1)앉아 있는 빅토르 쇼케의 초상. 세잔느. 1877년 경. 38×46cm. 콜럼버스 미술관

전체는 마치 한 편의 모자이크나 헝겊조각을 이어 붙인 융단처럼 풍부한 색채를 지닌, 수직·수평의 줄무늬로 이어지고 짜맞추어져 있다.

깍지 낀 손의 처리는 세잔느적 착상의 좋은 예이다. 물감의 질감이 재현된 대상들의 질감보다 더 두드러지고, 그려진 형태가 사물의 구조보다 더 명백하다.

책상 자체를 알아차리기 전에 책상의 채색된 상감세공을 의식하게 된다. 책상의 큰 형태를 파악하거나 마루와 벽이 어디서 만나는지를 알아내기는 어렵다. 어떤 대상도 완벽한 게 없으며 몇몇은 애매하다. 모든 것들이 어디에선가 독특한 방식으로 잘려져 있는데, 심지어 인물까지도 의자와 위쪽의 캔버스 가장자리에 의해 절단되어 있다.

전경에는 실제 융단의 모양이 흐트러져 있는데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와 동시에 깊이가 서로 다른 평면에 놓여 있는 사물들의 놀라운 접촉이나 연속성들을 보게 된다.

다른 것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의자 등받이와 위쪽에 있는 그림틀의 수직선 그리고 의자 뒷다리들과 캔버스의 세로변을 연결시키는 수평적으로 드리워진 그림자이다.

인물 또한 주변 대상들처럼 줄무늬로 분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줄무늬나 그 테두리들은 인접한 형태들에서 계속된다. 평면성을 추구함으로써 깊이를 약화시킨 또 다른 고안은 상이한 다섯 평면에서 뻗어 나온 선들을 하나의 시점에서 독특하게 교차시킨 것이다.

색채도 이러한 감각으로 적용된다. 아주 유사한 노랑, 빨강, 밝은 회색의 밝은 터치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평면들 속의 대상들에서 얼마나 분명하게 모여 있는가를 살펴보자.

이러한 고안들을 보완하는 것은 동일 평면에 속하는 선들의 상반된 불연속성이다. 벽 아래쪽 모서리의 어두운 띠는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다른 높이로 되어 있다. 이것은 벽과 마루가 이루는 직각을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한 것인데, 그 각도는 띠의 위아래에 있는 색조의 유사성에 의해서도 모호해진다.

원리는 분명하다. 같은 평면 위에 놓인 것을 해체하고 서로 다른 깊이에 놓인 것을 회화표면에서 통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수단을 통해서 그리고 회화의 질감을 통해서 회화는 그 자체가 그것이 재현하는 여하의 사물만큼이나 분명한 대상이 된 것이다.

물질적 표현은 외관상으로 촉각적이다. 빽빽한 짜임새는 구축적이고 점착성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전체는 빛과 대기를 지닌 설득력 있는 이미지이며, 특정한 개인과 장소를 친밀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후기작에서 나타나는 집중적이나 장엄함은 없을지 모르나, 색채와 터치의 아름다움과 강건함에서 그와 동일한 감성을 보여준다.

▲ 그림 2) 목욕하는 남자. 세잔느. 1885~1887년 경. 127×97cm. 뉴욕 현대미술관

<목욕하는 남자>는 이것은 풍경 속의 조각상이며, 목욕하는 남자라기보다는 생각에 잠긴 남자이다.(그림 2)

그는 자아에 완전히 몰입한 채 주변과 밀착되어 있다. 그의 피부색은 지상의 색조와 비슷하고 청색, 보라색, 녹색의 어두운 색조들과 장밋빛의 밝은 하이라이트들은 물과 하늘의 색조와 같다.

이 남자의 커다란 수직적 형태는 수평적 띠들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다. 수직선들과 수평선들은 서로 결부되어 있다. 굽은 팔은 오른쪽의 경사진 바위 모서리와 닮았고, 벌어진 다리는 지면과 대조를 이루며 구획된 손가락 모양의 물굽이와 유사하다.

바위 모서리와 굽은 팔이 이루는 대칭 외에도, 몸과 두 팔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단편들과 허리띠에서도 대칭적 형태가 나타난다. 이것은 수직적 형태들과 수평적 형태들이 꽉 짜이게 구축된 것이다. 허리띠에서 보이는 띠를 이룬 선들은 그 위쪽의 손가락들 및 왼쪽에 있는 대지의 띠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화실 안에서 상상해낸 이상한 풍경화이지만, 옷을 벗은 인물과 그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환경으로서는 자연스럽다.

인물과 풍경은 서로 화음하면서 똑같은 붓놀림, 동일하게 자유롭고 얼룩지고 변화하는 같은 내용의 색채로 구사되어 있다. 풍경의 주된 선들은 신체의 부분 부분과 결부된다.

상체는 하늘 속에 있고, 하체는 대지 위에 있다. 붉은색이 가해진, 무릎이 앞으로 나온 곳에서 대지의 녹색 띠가 시작된다. 굽은 팔은 인접한 하늘 속에서 마치 성인 주변을 떠도는 옛 미술 속에서의 천사들 같은 광휘와 소란을 불러낸다.

소묘는 소박한 탐색의 결과로서 형태들을 경험적으로 추적하고 짜맞춘 것인데 다소 서툴지만 리듬감이 있고 강하다. 어떤 터치들은 관절이 잘 이어진 다리에서처럼 과거의 연구 성과를 도입하고 있지만, 어떤 부분들은 보다 독단적이고 참신하다.

이렇듯 진지하고 자유로운 이 소묘는 1906년 경 젊은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계시가 되었으며 그들을 해방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신체는 양식화되지도 축소되지도 않았지만, 조화와 힘이라는 이상에 따라 면밀하게 재구축되었다. 이는 진부함이라든가 공식이라곤 없는 소묘로서 심지어 하나의 새로운 공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순수 형식’ 또는 ‘추상적인’ 구성인가?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기념비적인 목욕하는 남자에는 쉽사리 묘사할 수 없는 감정의 복잡한 성질이 있다.

인물은 엄격하게 풍경에 매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변을 에워싼 세계에 대해 동떨어져 있고 무관심하다.

하지만 이러한 명상은 이야기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상체는 그 자세에 의해 고정되어 있다. 그것은 영적으로 보이고 스스로 닫혀 있다. 인물은 걷고 있지만 옆구리를 짚고 있다.

상체는 초연하고 각이 지고 엄격히 대칭적이며 상대적으로 평평한 반면에, 하체는 보다 힘이 있고 강건하며 육적이고 형태감이 있으며 움직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열려진 비대칭적 형식이다.

이 두 가지의 대립적 테마들이 한 신체 속에 결합되어 있으며, 이 대립은 하늘과 대지의 성격에서도 나타나는 바, 한쪽은 의미한 반면 다른 한 쪽은 보다 안정되어 있고 견고하다.

자아의 드라마, 즉 격정과 명상적 정신 간의 대립, 활동성과 수동적이며 고립된 자아 간의 대립이 여기에 투사되어 있다.

결국에는 명상적인 것이 지배하게 되지만 신체는 따뜻한 색채로 남아 있고 힘차게 배치되어 있으며, 그런 반면 세계는 멀고 차갑기만 하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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