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상 인상주의 역할은 상당하다. 인본주의를 모토로한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달 곧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초상화만을 그리는 직업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는 시초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린다의 인상을 그대로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인상주의의 출현은 화가의 시각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시초를 닦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세잔느의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게 되는 큰 흐름이 된다.

이에 본지는 세잔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이어 샤피로의 폴 세잔느를 인용하여 독자들의 미술세계를 넓히고자 한다. 읽어가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점점 더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감성의 세계에도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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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에서 무엇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강렬한 감정의 소생이다. 아마도 이것은 보다 동적이며 난해한, 새로운 경향의 형식들과 연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잔느 말년의 작품은 구축적이고 엄숙한 그의 미술 속에 포함시킬 수 없을 정도의 황홀함과 파토스의 효과를 제공한다. 그의 초기 그림들의 정서적 성격이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아주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었다.

1870년대에 세잔느가 인상주의 기법으로 전향했을 때 그는 <여성에게 바침>이라는 풍자적인 스케치에서 낭만주의 예술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는데 거기에서는 화가, 시인, 음악가, 사제 모두가 그들 앞에서 부끄럼 없는 나체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영원의 여성을 찬미한다.

공상적인 테마들은 세잔느 후기작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1880년 이후 그의 미술 주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예외적인 그림들에 대해 지적해 두는 일은 가치가 있다.

이것들은 새로운 미술이 때때로 분출하는 자신의 일부를 고의로 억압하는 데에 어떻게 의존하고 있는가를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송두리째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1880년대에는 질서와 객관성에 대한 의지가 더 두드러진다.

그는 질서에 대한 욕구에 깔려 있는 정서적 뿌리를 이해했던 까닭에 ‘흥분어린 평정’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가가 자신의 캔버스, 이젤, 팔레트와 동화되어 이상하게 비인격적으로 보이는 자화상(그림 1)이 있다.

▲ (그림 1) 팔레트를 든 자화상. 세잔느. 1885-1887년. 72×91cm. 취리히, 부를레 재단

고독, 절망, 광분의 내적 세계는 또한 이 시기의 몇몇 풍경화 속에도 스며 있다. 그 하나인 <큰 소나무>(그림 2)는 요동하는 감정을 담아낸 작품인데 휘몰아치는 형태와 높다란 왕관 모양의 잎들이 짙은 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실루엣을 이루고 있다.

▲ (그림 2) 큰 소나무. 세잔느. 1892-1896년. 84×91cm. 브라질, 상파울로 미술관

이것은 그가 30년 전에 한 소년으로서 낭만주의 시인들로부터 감화를 받아 나무를 소재로 썼던 시의 정서를 되살린 것이다.

생애의 말년에 그는 때때로 거대한 고독의 테마들을 찾아 나섰다. 그가 좋아한 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그늘진 숲 속, 험준한 바위, 황폐한 선착장, 폐허가 된 건물 등 결코 사람이 편안할 수 없으며 자연의 폭력성이 두드러지는 장소들이었다.

그는 이렇듯 포연하며 인간성과는 더욱 멀리 떨어진 공간을 자신의 화폭 속에 재창조함으로써 과거의 억압적 충동들을 자연 자체에다 옮겨 놓았다. 자신의 불순과 죄악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으면서 냉혹한 혹은 지나친 고독 속에서 모종의 감각적 희열을 느낄 줄도 아는 은둔자의 세계이다.

비록 1880년대의 평정된 양식에서 이러한 만년의 장면들을 상상해 보기란 어렵다 할지라도 고독, 죽음, 자연의 폭력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은 그것들 자체로서는 그의 형식에 나타나는 바로크적 경향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정물의 각이 진 조망과 더욱 깊숙한 깊이, 그 새로운 정교함은 파토스를 표현한 그림들과 같은 정서에서는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초기 단계들과 함께 고찰해 보면 그것들은 운동감과 강도라는 측면에서 비슷하다. 관조하는 마음의 정서들이 제 나름의 발언을 시작하여 우수가 되던 환희가 되던 그 나름의 기분을 그림에 나타난다.

이때부터 우리는 이전 단계의 보다 진정되고 균형 잡힌 작품들과는 달리, 단일한 색조나 형태의 강세가 전체를 지배하는 그림들을 많이 보게 된다.

▲ (그림 3) 생트 빅투아르 산. 세잔느. 1904-1906년. 64×80cm. 필라델피아 미술관

특히 숲의 장면이나 탁 트인 풍경들(그림 3)에서는 뚜렷한 형태가 없는 식물들이 생기 있는 여러 가지 색채의 터치들로 표현되는데, 이것들은 너무나 크고 또 윤곽선으로 한정되지 않은 까닭에 대상 없는 순수 회화의 상태에 가까워져 있다. 즉 거기에서는 사물들의 밀도가 단일한 색채 화음들로 바뀌어져 가는 것이다.

이 만년의 미술은 다채로운 색조를 연속적으로 구사하고 대상들을 격렬하게 용해시킴으로써 마치 인상주의가 되살아난 듯이 보이긴 하지만, 초기 단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무게감과 확고함을 갖고 있다.

이것은 그 착상의 과감한 극단성에서 볼 때 그 어떤 인상주의 작품과도 전혀 다르다.

색채는 햇빛과 독립되어 있으며, 그 힘은 견고한 물질적 대상들이 절정 속에서 분해됨으로써 해방된, 강렬한 고유색들에 의해 얻어진다.

세잔느는 이러한 그림들로써 야수파와 표현주의가 대두되는 얼마 뒤의 20세기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말하지만 그는 하나의 정서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았으며,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예컨대 그의 정원사 발리에를 그린 우아한 초상화(그림 4)에서 보듯 폭발적인 색채조차도 보다 억제된 열정으로써 파악된 전체 속에서 일개 요소에 지나지 않는 그림들을 그렸다.

▲ (그림 4) 발리에의 초상. 세잔느. 1906년. 64×53cm. 시카고, 개인소장

세잔느의 업적인 미술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작품은 한 화가가 지침이 되는 종교나 신화 또는 어떤 명백한 사회적 목적에 따르지 않고 자기 주변의 세계에 대한 지각에 형식을 부여하여 의미 있는 표현을 성취해낼 수 있다는 산 증거가 된다.

설령 그의 작품 속에 이데올로기가 있다 해도 그것은 무의식적 태도 속에 감추어져 있을 뿐 많은 전통적 미술에서처럼 직접적으로 노출되지는 않는다.

세잔느의 그림에서는 오래된 내용의 장엄함에 비하면 단편적이고 제한된 것으로 보이는 순전히 인간적인 것, 개인적인 것 등이 미술의 가장 고귀한 질을 위한 충분한 재료가 된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교회도 없고 과거의 익명적 장인정신이 가진 우아함도 없는 19세기의 세속적 문화가 과거의 권위적 문화 못지않게 위대한 예술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화가의 고독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가능했었던 까닭은 사적인 예술이라는 생각이 사회체제 속에서의 개인적 자유라는 보다 일반적인 이상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그 이상으로부터 사적인 표현의 미술이 보편적 의미를 가진다는 궁극적인 신념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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