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상 인상주의 역할은 상당하다. 인본주의를 모토로한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달 곧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초상화만을 그리는 직업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는 시초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린다의 인상을 그대로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인상주의의 출현은 화가의 시각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시초를 닦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세잔느의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게 되는 큰 흐름이 된다.

이에 본지는 세잔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이어 샤피로의 폴 세잔느를 인용하여 독자들의 미술세계를 넓히고자 한다. 읽어가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점점 더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감성의 세계에도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1872년 이후 몇 년 동안 세잔느의 미술은 정신과 기법에 있어서 인상주의적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다른 인상주의자 못지않게 색다른 경향을 가진 독특한 화가의 그림이다. 인상주의자들 가운데 세잔느외에 그 누구도 촉각적인 형태와 그에 상응하는 선의 질서에 그토록 마음을 쏟은 사람은 없다.

1877년의 다른 인상주의자들의 작품들과 나란히 놓고 보면, 세잔느의 그림들은 이미 고전적 정신의 작품으로서 두드러진다. 비평가 리비에르는 그의 작품들을 가장 위대했던 시대의 옛 미술품과 비교하면서 그리스적이라고 기술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세잔느의 고전적 혹은 구축적 단계라고 일컫는 이 단계는 그 때 막 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성과 색채의 조형적 사용에 대한 세잔느의 새로운 엄격성에 관해서는 이미 많이 논의된 적이 있지만 이 새로운 양식에 있어서 대상이 가진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바로 새로운 미술의 필요조건이 되는 소박하고 대단히 진지한 일종의 경험주의가 있다.

세잔느는 대상을 자신의 감각으로부터 재구성함에 있어 마치 그의 초기 그림의 과격성에 대해 보상이라도 하듯 자신을 겸허하게 대상에 맡긴다. 그에게 있어 대상이란 그리스인들이 고전적 조각을 창조할 때 인체에 전념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한다. 세잔느는 눈앞의 대상을 캔버스 위에 구현하는 데서도 그가 회화를 통해 추구했던 일관성, 안정성, 개별적 특성들을 추구했다.

그는 언제나 대상을 연구하는 화가였으며 인상파적인 단계에서조차도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했던 것처럼 사물을 대기와 햇빛 속에 용해시키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과거의 그림과 비교해볼 때 대상의 새로운 무게와 명료함은 그의 미술에 있어 진정한 개혁이 된다.

1875년 직전 그의 풍경화와 정물화에서는 많은 불안정한 얼룩들, 풍성하고 회화적인 색의 반점들이 보인다. 그 구성은 통일되어 있긴 해도 사물의 윤곽에 의해 명료하게 부각되어 있지 않으며 후기 작품들이 갖고 있는 고상한 단순성이 결여되어 있다. 대상을 꼼꼼하게 음미하는 것은 전체 화면을 더욱 단단하게 통합시키는 일과 결부된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새로운 느낌은 1870년대 초에 인상파 양식으로 그린 막바지 작품인 듯한 세심한 정물습작에서 예견되고 있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이 정물화들은 몇 개의 사과를 그린 소품들인데 과일의 둥근 성질과 색을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값진 것이다. 1880년대에 세잔느는 대상들을 종종 원시시대의 그림처럼 집중적으로 배열하여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제시하지만, 다양한 배치와 중첩 속에 우연의 양상을 띠고 있어서 강한 창의력과 균형을 이룬다.

세잔느는 대상들의 외양은 물론 배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의심할 바 없이 루브르의 대가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던 것이다.

비록 세잔느의 사고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보수적으로 되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자기의 미술에 안주하지 않았다. 1890년에서부터 그가 사망한 1906년까지의 수년간은 엄청난 발전의 시기이다. 1890년대의 정물화에는 대단히 복잡하고 호화로운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전에는 단순하던 배경이 풍성하게 장식된 주름으로 가득 차게되고, 탁자와 그 주위는 흔히 그림틀에 의해 이상하게 잘려 공간 속에 모나게 놓여지기도 하며, 대상들의 경사는 더욱 심해진다.

▲ (그림 1)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 세잔느. 1895-1900년. 75×91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그림 1), <큐피드 상이 있는 정물>(그림 2) 등은 캔버스에 대한 이같은 새로운 탐색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그의 대가다운 솜씨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 (그림 2) 큐피드 상이 있는 정물. 세잔느. 1895년. 57×70cm. 런던 코틀런드 미술연구소

풍부한 색채와 형상, 넘치는 감각, 가슴에 와 닿는 찡하는 쾌감 그리고 색다른 원근법에 의해 감상자는 대상의 공간 속으로 보다 가깝게 이끌린다. 이 그림들은 개방되고 불안정한 그 형식에서 고전적 르네상스 미술을 이은 바로크 양식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잔느의 발전은 그와 상반되는 작업도 수반하고 있다. 그는 바로크적 정물화들을 창작하면서도 <카드놀이하는 사람들>(그림 3)의 연작과 <목욕하는 여인들>(그림 4)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이것들은 이상적인 짜임새와 안정성을 가진 고전풍의 작품들이다.

▲ (그림 3)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세잔느. 1890-1892년. 47.5×57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 (그림 4) 목욕하는 여인들. 세잔느. 1898-1905년. 205×245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이 작품들은 세잔느에게 있어서 폭넓은 사고와 심지어 고전적이거나 혹은 바로크적이라는 단일한 특징조차도 그의 미술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며, 마치 착상된 형식들이 그의 본성의 갖가지 요구에 부합하듯이 단지 그 가치를 탐구해 본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프랑스에서 17세기 있었던 루벤스와 푸생 추종파들간의 대립과 19세기에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대립 이래로 두드러지게 됐던 양식의 양극성은 세잔느에게 있어서는 예술적으로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 두 가지 모두 미술관에서나 자연을 볼 때 세잔느가 그 자신의 경험 안에서 똑같이 발견하는 타당한 견해들로서 유용한 것이었다. 그는 평행으로 혹은 비스듬히 후퇴하는 면들에 의해 교대로 깊이를 구축하는 것에 아주 일찍부터 익숙해 있었다.

1870년대에 그는 인상주의자로서 급하게 후퇴하는 집들과 길들이 있는 수많은 풍경화를 그리는 동시에 캔버스면과 평행하는 벽 앞에다 단순한 형태의 정물들을 배치하기도 했다.

청년기에 그는 들라크루아를 흠모했다. 그는 또한 자기 집의 거실을 위해 선적인 양식으로 사계절의 연작 패널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우쭐한 영웅심에서 거기에 앵그르의 이름으로 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미술가를 찬양함에 있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화해될 수 없는 유의 미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세잔느는 양자의 중요한 가치들이 한 작품 안에 공존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했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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