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상 인상주의 역할은 상당하다. 인본주의를 모토로한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달 곧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초상화만을 그리는 직업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는 시초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린다의 인상을 그대로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인상주의의 출현은 화가의 시각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시초를 닦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세잔느의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게 되는 큰 흐름이 된다.

이에 본지는 세잔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이어 샤피로의 폴 세잔느를 인용하여 독자들의 미술세계를 넓히고자 한다. 읽어가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점점 더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감성의 세계에도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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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에 세잔느는 후일 그의 아내가 된 젊고 아름다운 여인 오르탕스 피케와 동거를 시작했다. 이 일이 그의 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해서 알 수 없다.

하지만 그해 이후 세잔느의 미술은 차츰 세련미를 더해간다. 그는 마네에게서 영감을 받았지만 이제는 마네의 미술에서 충격적인 대비보다는 색조와 절묘한 솜씨를 찬양하게 된다.

괄목할 만한 정물화 <검은 시계>(그림 1)와 위대한 미완성작 <졸라에게 글을 읽어주는 알렉시스>(그림 2)는 새롭게 마네의 영향을 받아 그린 본보기이다.

▲ (그림 1) 검은 시계. 세잔느. 1870년 경. 53×72cm. 스타브로스 니아르코스 소장
▲ (그림 2) 졸라에게 글을 읽어주는 알렉시스. 세잔느. 1869년 경. 브라질 상파울로 미술관

첫 번째 것은 꼼꼼하게 그려졌지만 초기의 격정의 흔적이 다소 남아 있다. 두 번째 것은 마네가 그린 졸라의 초상에 기초한 것인데, 색조가 보다 단순해지고 지극히 미묘해졌다. 검정, 파랑, 회색의 아름다운 색체체계는 그 범위와 공간적 조화에 있어서 마네를 능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0-71년 겨울에 그린 에스타크 풍경화에서처럼 이 시기에도 그의 근원적인 열정이 지속되고 있다.

인상주의를 거치면서 세잔느에게 결정적인 변화가 생긴다. 세잔느는 1860년대에 인상주의자들, 특히 피사로를 알게 되었다.

일찍이 1866년에 그는 졸라에게 야외에서만 작업함으로써 ‘자연의 참되고 본래적인 면’을 포착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옛날의 거장들에게서 아쉬움을 느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주의자의 계획이기도 했던 이러한 계획은 1872년에 가서야 실현되었는데 그 해에 그는 피사로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그와 함께 퐁토아즈와 오베르 근방의 시골에서 직접 자연에 따라 작업을 했다.

이 시기 이전에 그린 그의 야외 그림들은 몇몇 작품을 빼고는 여전히 실내 그림의 색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피사로는 세잔느의 변화에 있어 실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세잔느에게 선생이나 친구 이상이었고 제2의 아버지였다. 세잔느는 경의를 가지고 그에 관해 언급하면서 30년 후에 피사로를 이렇게 불렀다. ‘겸허하고 위대한 피사로, 그 분은 자문을 구할 만한 분, 선한 주님과도 같으신 분이다.’

세잔느는 자기 아기가 태어난 바로 직후에 피사로와 가까이서 살기 위해 파리를 떠났다. 그는 자식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엑스에 있는 자기 아버지에게는 보일 수가 없었다. 아직은 그의 내연관계가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피사로와 세잔느가 함께 작업할 때 찍은 사진(그림 3)에서 하얀 턱수염이 난 피사로(1830년 生)가 그의 제자보다 불과 9살 밖에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놀라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지긋한 나이다. 이들의 머리는 비슷하게 벗겨져 있으며, 세잔느가 부친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둘 사이의 정신적 일체감이 느껴진다.

▲ (그림 3) 세잔느(앉아 있는 사람)와 피사로(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 1877년. 뉴욕 존 리월드 소장

피사로 역시 사업가로서의 경력을 포기한 후 가족의 희망을 뿌리치고 그림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모종의 국외자, 즉 유태인이라는 사실은 반항적인 젊은 세잔느에게는 아마도 꽤 중요했을 것이다.

피사로는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온건한 무정부주의적 신념에 충실했다. 그는 인상주의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윤리적인 인물이었고, 대가족의 가장이었으며, 타인들에게 매우 진지한 관심을 쏟았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세련된 그의 편지에서 풍기는 동정심과 온화한 지혜는 인상적이다. 선배 화가들 중에서 그는 가장 열심히 남에게 배우려 했고 남들의 다양한 재능을 솔직히 인정해 주었다.

그는 파리와 루앙에서 훌륭한 그림들을 몇 점 그리긴 했지만 그의 미술에는 당시의 도회적인 속된 감정, 즉 오늘날 많은 인상주의 그림들에 역사적 관심을 부여하는 야유회, 뱃놀이, 휴일의 군중 그리고 매력적인 현대풍 의상 등을 그린 것은 거의 없다.

코로의 제자였던 그는 인상주의자 가운데 아마도 가장 목가적이며 이 집단에서는 유일한 농민 화가일 것이다.

피사로는 직접 자연을 보면서 느리고 끈기 있게 그리는 방법을 세잔느에게 가르쳤다. 그것은 보는 방식의 훈련이었으며, 이에 따라 그는 이제껏 모델링이나 극적인 강조를 위해 써왔던 모든 관습적인 색조변화나 거친 명암 대조법을 신선한 색채로 바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상주의적인 접근법은 세잔느의 그림을 보다 시각에 충실한 것으로 만들고 활기찬 스타일을 원하는 그의 요구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충동적인 상상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이 접근법은 세잔느에게 수용적이고 심미적인 태도를 깨닫게 하여 힘과 어두운 분위기로써 그를 사로잡았던 풍경이 아닌 그 풍경의 심오한 매력에 눈뜨게 해 주었다. 이 시기에 그는 꽃을 소재로 최초의 정물화들을 그리게 된다. 세잔느는 새로운 가르침을 받으며 긴장된 대비를 줄이고 부드러운 조화를 애호하게 된다.

붓질의 리듬은 엄청난 충동의 발산으로부터 꾸준한 감각의 명멸로 옮아간다. 이제 그는 그의 내부가 아닌 외계로부터 더 많은 자극을 받게 된 것이다. 큰 형태들은 작은 터치들에 의해 해체되거나 차단되었다.

구도는 극적인 진전을 잃고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색채변화를 통해 더욱 장식적이면서 치밀하게 된다.(그림 4) 가장 즉각적으로 그린 그의 스케치에서조차 세잔느는 자연은 물론 캔버스까지도 상당히 의식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림의 최소 단위들을 연구하는 새로운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 (그림 4) 오베르의 풍경. 세잔느. 1874년 경. 64×79cm. 시카고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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