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상 인상주의 역할은 상당하다. 인본주의를 모토로한 르네상스의 출현으로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상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달 곧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초상화만을 그리는 직업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게 되는 시초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화가의 눈에 보이는 인상을 그린다의 인상을 그대로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인상주의의 출현은 화가의 시각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대미술의 시초를 닦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세잔느의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계보를 알게 되는 큰 흐름이 된다.

이에 본지는 세잔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마이어 샤피로의 폴 세잔느를 인용하여 독자들의 미술세계를 넓히고자 한다. 읽어가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점점 더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감성의 세계에도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이어 ▶

 

1860년대 말에 마네의 영향과 야유회와 뱃놀이 장면에 대한 새로운 취향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 명량한 세계를 재현하기 시작하면서 그 세계를 몽상적 분위기나 또는 욕망이 꿈틀대는 심 상으로 변화시킨다(그림 1).

▲ (그림 1) 세잔느, 야유회. 1869년경. 59×80cm. 파리, 오르세미술관

<풀밭 위의 점심>(그림 2)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 그는 세 명의 나체 여인과 세 명의 옷 입은 남자들을 그림으로써 마네를 능가한다. 그 세 남자 중에는 세잔느와 닮은 한 남자가 깊은 생각에 잠긴 자세로 둑 위에 앉아 있다. 돌출된 형태의 나무들은 인물들보다 더 두드러지며 그 인물 형태들과 조응하고 있다.

그리고 세잔느는 공간의 중심부 근처의 큰 나무와 물에 비친 그 나무의 그림자로써 이국적인 대칭 형식을 구성했는데, 이 그림자는 아래로 드리워져 짝지운 남녀들의 대응물이 되는 병과 술잔 부근에서 끝난다. 흐릿한 인물 형태들을 통해 이처럼 풍경이 역동적으로 표현된 것은 당시의 그림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 (그림 2) 세잔느, 풀밭 위의 점심. 1870년. 파리, J.V.펠르랭 소장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그림 3)의 배경은 대화하는 인물들의 무관심과 어울리는 것이 특징 없는 나뭇잎으로 되어있는 반면에, 세잔느는 보다 격정적인 정신으로 전원의 테마에 접근한다.

▲ (그림 3) 마네, 풀밭 위의 점심. 1863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인상주의자들이 풍경의 요소들을 흐릿하게 한 반면, 세잔느는 그것들을 확대 해석하여 인물상에서 불충분하게 표현된 감정이나 인물들 간의 관계까지 부여한다. 그의 그림은 기묘한 대응들과 대비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자연과는 무관한 것으로 마치 정신병자의 미술에서처럼 무의식적 충동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세잔느 초기 작품의 특성은 그가 젊었을 때 썼던 편지나 그의 친구들이 남긴 말로써 짐작되는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보게 되는 세잔느는 충동적인 행동을 곧잘하고는 절망에 빠져버리는, 비사교적이고 우울하고 격정적인 젊은이다. 그는 심한 무력감에 시달리는 열정적인 기질의 소유자로서 수줍음이 상상력을 억제하지 않으며 더욱 긴박하고 영감어린 표현을 해내는 부류에 속한다.

비합법적인 그의 출생과(후일 그의 부모들이 결혼함으로써 이 점은 보상되었다) 아버지 가게의 점원이었던 헌신적인 자기 어머니의 비천한 출신도 세잔느의 성격 형성에 관해 확실한 것 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엄한 부친과의 지속적인 갈등에 대해 알고 있다. 세잔느가 몹시 두려워했던 그의 부친은 외아들인 세잔느를 가족은행에서 일하게 하기 위해 자식의 희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법률학교로 보냈다.

부친을 여윈 학교 친구 에밀 졸라와 사귀던 엑스에서의 소년 시절 이래 세잔느는 문학적 예술, 보헤미안적인 삶의 막연한 자유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을 채워갔다.

젊은 시절의 그의 편지에는 냉소적인 자기탄식이 자연과 상상적인 연애의 환희에 관한 조잡한 운문들과 번갈아서 나타난다. 실재의 여인을 언급한 것은 엑스의 한 직공에 관한 것인데 그는 그녀에게 감히 접근도 못했으며 또 이미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편지들의 내용은 여인들과 가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며, 산문이나 운문으로 쓴 격렬한 환상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은 미숙한 발산에 불과하다고 무시되어 왔지만 세잔느와 여성 혹 은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가 있으므로 참조해 볼 가치가 있다.

가령 그는 단테 풍의 지옥에서 한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아버지가 제공한 잘려진 사람의 머리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장면을 삽화까지 그려 넣어 잔인한 유머로 묘사하고 있다.

또 어떤 공상적인 시에서는 폭풍우치는 밤에 세잔느가 캄캄한 숲 속에서 사탄과 마귀들에게 쫓기고 있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소리에 마귀들이 혼비백산 흩어진다. 그가 이 마차 안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의 가슴에 입맞추자 갑자기 그녀가 무서운 해골로 변해 그를 꽉 껴안는다.

고전풍으로 쓰여진 또 다른 시 <한니발의 꿈>에선 이 젊은 영웅이 술에 골아 떨어져 식탁보에 포도주를 쏟은 채 그 아래 쓰러져 잠을 자는데, 무서운 아버지가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들이닥치는 꿈을 꾼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술 취한 아들의 귀를 쥐고 흔들며 취태와 방탕한 생활을, 소스와 포도주와 럼주로 옷을 더럽힌 것을 꾸짖는다.

이러한 공상들은 부친의 엄한 감독을 받고 자랐던 젊은 세잔느의 어떤 불안을 시사해 주며, 그가 일생에 걸쳐 정물에 집착 했던 것이 혹시 세잔느와 부친의 갈등의 무대이자 그 상징인 가족 식탁에 대해 화목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충동 때문이 아니었는가 묻게 한다.

이러한 정서적 격동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잔느에게는 성공을 향한 집념이 있었고 졸라보다 고집스런 예술에의 헌신이 있었다. 마침내 부친의 허락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그의 고집 때문이었지 화가로서의 분명한 가망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족의 지원(이것은 처음엔 보잘 것 없고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부친의 사망 후에는 모든 경제적 걱정에서 벗어나게 할 만큼 충분했다)은 그의 작품이 성숙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지원을 얻지 못했더라면 그는 도무지 달리 버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부친과 함께 찍은 사진 두 장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기질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바짝 긴장해 있는 내성적인 예술가에 비해, 자수성가한 상인이자 지방 은행가인 부친은 혁명으로 인해 등장한 프랑스의 구부르조아 계급의 빈틈없고 자신만만한 기풍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아들 역시 자기 나름의 신념에 차 있으며 자신의 일에 관해 억센 고집을 보이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완강하고 냉정하며 속물적인 아버지의 경우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성격과 예술에 대한 소명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간에 세잔느는 그 시대의 사상 및 가능성과 더불어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839년에 그가 태어나서 자란 엑스는 교수법이 구식의 아카데 미적인 지방이었지만, 그래도 그 곳은 낭만주의적인 시인들과 화가들이 젊은이에게 자유의 이상을 일깨워 주던 고장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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