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

그리하여 일각에서는 의료인에게 일반 직업인에게 요구되는것 이상의 특별한 윤리를 요구하는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 전문직업주의(professionalism)를 포기하고 일반직업인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형식의 권익운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다음 챕터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실천하였던 사례를 중심으로 그 가능성을 점검해 보고 우리 현실에 맞는 대안을 모색해 보도록 한다.
 

4. 치과전문직 윤리의 근거

위와 같은 환경의 변화는 전문주의의 이념을 크게 훼손할 뿐 아니라 전문직으로 인정 받던 의료인의 지위에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상황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는데 그러한 대처방법 중 하나로 제시 된 것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의사노동조합은, 최초의 사회보장정책이 실시된 독일에서 가장 먼저 결성되었으며 (1898년), 1970년대에 이르면 가장 자유주의 적인 의료시스템을 가지고있는 미국에서도 많은수의 의사노동조합이 결성된다.

이들 대부분은 얼마 가지 않아 해체되고 말지만, 1972년에 결성된 <미국 의사와 치과 의사 노동조합> (UAPD: Union of American Physicians and Dentists) 은 지금까지 꾸준한 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쟁의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한다.

UAPD의 성공은 치과의사의 윤리를 논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즉, 공익을 수호한다는 전문주의의 도덕적 이념에 가려져 제대로 표출할 수 없었던 의료인의 권익을 당당히 주장함으로써 의료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실지로 UAPD는 30년동안 수많은 사건에 개입하면서도 한번의 파업도 없이 많은 사건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의사의 권익옹호를 기본적 목표로 삼으면서도 무리한 요구나 폭력적 쟁의행위를 최대한 억제하여 원만한 해결을 유도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공중의 이익에 역행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 성공의 비결이 아닐까 여겨진다.

다시 말해, UAPD는 노동조합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전문주의의 이상을 구현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미국에서 의사노동조합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전문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대중은 도덕적 전문주의의 전통을 가진 의사들에게 기본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으며, 또한, 노동운동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운동을 벌이는 의사에게 큰 거 부감을 가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는 개인주의적 윤리의식이 발달한 서구의 문화적 전통도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적 의미의 전문화 과정을 제대로 경험하지도 못했고 유교의 문화적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는 한국의 치과의사가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자신들의 권익을 추구 한다면, 과연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전통적 문화정서와 전문주의의 도덕적 이상, 그리고 노동조합주의의 합리적 조정행위 사이의 조화를 추구해야한다.

다양한 대외활동을 통해 사회와의 접촉을 넓히고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는 한편, 집단 이기주의의 유혹을 극복하면서도 직종의 이익과 공중의 이익을 함께 보장할 수 있는 합리적 조정 장치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2000년의 의사파업에서 치과의사가 배워야 할 점이다.

한국의 치과의사는 세 가지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가치관이고 둘째는 전문직으로서의 의무와 자부심이며 셋째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냉철한 합리주의다.

치과의사의 윤리를 바로 세울 수 있는지의 여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세가지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서문을 쓴 대제학 이정구는 의술을 가리켜,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끼는 '덕'(仁民愛物之德)이며, 사용을 편리하게 하여 삶을 도탑게 하는 '도'(利用厚生之道)라고 썼다.

의술에 관한 전통적 가치관을 가장 일목요연 하게 정리한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전통적 가치관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규제하는 구체적 행위규범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런 행위규범의 사상적 밑그림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전문주의는 전통적 가치관을 현대적 삶에 접근시키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 백성에 대한 사랑이란 추상적 개념이 여기서는 공공의 이익이란 현실적 목표로 전환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한다는 이타적 정신은 변함이 없다.

반면에 노동조합주의는 기본적으로 이기적 동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때의 이기주의는 다른 이해당사자의 합리적 요구를 충분히 인정한 뒤에 얻어지는 권리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전통적가치관과 전문주의 윤리의 키워드가 '이타주의’ 라면, 노동조합주의 윤리의 핵심은 이기주의라기보다는 '합리성’ 이다.

이타적 서비스 정신과 합리적 의사결정능력 이야말로 치과의사윤리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5. 결론

한국사회는 유래가 없는 전국규모의 의사 파업을 경험했으며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관한 윤리적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외국의 사례를 인용하여 파업의 정당성 여부를 논증하거나, 윤리선언이나 의료윤리의 원칙을 적용해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러한 연구성과들을 전문직윤리라는 통합된 논의의 장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파업에 관한 비난과 옹호의 논리는 많이 개발되었지만, 그것들을 추슬러 전문직인 의료인에게 사회가 어떤 의무와 권리를 부여할 것인가에 관한 건설적 논의는 별로 없다.

의료윤리나 생명윤리는 있지만 전문직윤리에 관한 논의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전문직윤리는 개인이 아닌 집단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윤리적 논증의 성격도 의료윤리나 생명윤리의 경우에서와 다르다. 의료윤리가 의학적 판단을 주로 하면서 철학적 논증을 부로 한다면 생명윤리에서는 철학적 논증이 주가 된다.

반면에 전문직윤리에서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면서 임상적 경험과 철학적 논증이 가미된다.

전문직 윤리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된 것은 아마도 각 전문직종의 주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의사나 간호사들은 임상 상황에서 일상적으로 다양한 윤리적문제에 부딪치기 때문에 의료윤리가 주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철학자나 생명운동가들은 첨단지식과 기술이 일으키는 문제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생명을 보는 근본적 관점에 관심을 가진다.

필자는, 치과의사의 윤리는 의료윤리나 생명윤리보다는 전문직윤리를 중심으로 논의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치과의사 직무의 성격으로 보아서도 그렇지만, 보건 의료윤리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치과의사의 전문직 윤리는 어떤 개념적 근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검토해 보았다.

도덕주의, 전문주의, 노동조합주의 등이 그 검토 대상이었는데, 어떤 한 가지를 취하고 다른 것을 버리기보다는, 그 각각의 개념이 성립한 역사적 배경을 심층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현재의 윤리적 상황에 주체적으로 적용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전문직윤리의 요체는 주체의 도덕성과 관계의 합리성이다. 앞으로 의료윤리와 생명윤리에 관한 논의와 함께 전문직윤리에 관한 논의도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강신익 교수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거쳐 강신익치과를 개원했었다. 다시 인제대학교 일산백병원 치과과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부산대학교 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서로는 『의학오디세이(역사비평, 2007)』, 『철학으로 과학하라(웅진, 2008)』, 번역서로서는 『환자와 의사의 인간학(장락)』, 『사화와 치의학(한울, 199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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